여름 길 34, 뉴질랜드 1

엄마와 딸의 여행 1일 - 퀸스타운, 꿈의 휴양지

by 지구 소풍 이정희

남반구의 여름빛은 참 묘하다. 선선한 공기 속에서도 햇살만큼은 살결에 차근히 내려앉아, 오래전에 잊고 지냈던 평온를 조용히 깨워낸다.


뉴질랜드의 제2도시 퀸스타운은 아담한 산악마을 특유의 따스한 기운이 가득한 곳이었다.

호주 멜버른에서 비행기로 세 시간 남짓 날아오면 닿는 남쪽 끝, 남극과 더 가까운 이곳의 공기는 살짝 선선했다.


휴가의 초성수기라 그런지 조그마한 마을 전체에 활기가 흐르고, 길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배어 있었다. 조금만 걸어도 볼이 은근히 따뜻해지고, 그 위로 서늘한 바람이 살짝 닿아 균형을 맞춘다. 몸도 마음도 순식간에 일정한 온도로 정돈되는 기분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뉴질랜드 퀸스타운 공항
호텔 정원

멜버른에서 일주일을 혼자 보내고 난 뒤, 그저께 한국에서 출발한 딸과 오늘 이곳에서 합류하였다.

은퇴 후 이렇게 모녀가 다시 같은 곳을 향해 걷는다는 것이 새삼스럽고도 뭉클했다.


우리가 묵는 노보텔 호텔은 넓게 뻗은 장미 정원과 깊은 산속의 얼음물들이 모여 만들어낸 호수 같은 강과 바로 이어져 있었다.

지금 한겨울인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색감의 장미들이 주먹만 한 크기로 탐스럽게 피어 있었고, 나는 그 꽃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며 뉴질랜드 2주일 여행의 시작을 천천히 즐겼다. ‘여기는 우리나라와 반대 계절의 나라’라는 사실을 말없이 알려주었다.


청정지역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하늘이 맑고 공기는 투명했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맨발, 수영복 차림으로 강가를 드나들며 느긋한 오후를 보냈다.

밤 8시가 넘어서도 해가 지지 않아 강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 느긋한 여름을 누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와카티푸 강에서 제트보트를 타고 협곡 속으로 들어갔다.
‘저 아름다운 협곡 사이, 강의 시작과 끝은 어디일까?’
이곳의 오래된 무역선을 개조한 증기기관 유람선도 유명하지만 협곡 가까이 다가갈 수 없기에 늘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더 모험을 선택했다.


제트보트의 운전석 옆 끝자리는 물보라를 온몸으로 맞는 자리였다. 이제 이런 모험적인 배는 마지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과감하게 그 자리를 골랐다.

보트가 출발하자 강물 특유의 흙냄새와 차가운 물보라가 얼굴에 닿았다. 처음엔 놀라 움찔했지만 곧 그 촉감이 오히려 반가워졌다.

딸은 물을 맞을까 봐 긴장하면서도, 나보다 더 신난 얼굴이었다.

갑자기 720도 회전을 할 때면 물보라가 솟구쳤다. 사람들은 괴성을 섞어 웃고, 물이 튀길 때마다 옷이 달라붙는 감각이 생생했다. 한 시간 남짓의 질주는 협곡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이었지만, 동시에 제법 큰 모험이기도 했다.

‘아… 작은 배 체험은 정말 이제 힘들어지는 걸까?’
그렇게 웃으며 딸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와카티푸 호수의 풍광은 스위스 알프스의 레만 호수를 떠올리게 할 만큼 장엄하고도 고요했다.

모래사장에 앉아 하늘과 구름, 숲과 물빛을 바라보고 있으니 마치 한 폭의 그림 속에 들어온 듯 넋이 나가 버렸다.


멀리서 부는 바람 소리, 물결이 잔잔하게 밀려오는 소리, 나뭇잎이 서로 스치는 소리… 그 모든 것이 모래사장 위에 앉은 우리 모녀를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전체 풍경이 하나의 결로 느껴졌고, 눈을 뜨면 하나하나의 색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이곳에서는 시선과 청각, 후각과 촉각이 서로 묘하게 연결되는 듯하다.

피오르드 랜드 국립공원 안내소(밀퍼드 트래킹 교육장)

내일 아침부터는 4박 5일간 ‘꿈의 트레킹’—세계 3대 트레킹 중 하나인 밀퍼드 사운드트랙—이 시작된다.

네팔의 안나푸르나, 페루의 마추픽추와 함께 세계 3대 트레킹으로 손꼽히는 명소다.

코로나팬데믹으로 미루다 드디어 일년 전 밀포드 홈페이지가 열리자 마자 비싼 돈(1인당270만원)을 내고 예약을 하고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 사무실에서 오후 2시 40분부터 사전 교육을 받았는데,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이 연령대도 다양했고, 모두들 들떠있었다.

친절한 설명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며 이 길을 걷고 싶다’는 마음만큼 질문이 이어졌다.
앞으로 2~3일은 비 예보가 있고, 인터넷도 닿지 않는 청정 지역이지만, 오히려 그 고요함이 우리 모녀에게 더 귀한 시간이 될 것 같았다.


딸은 그토록 흠모하는 영화 반지의 제왕 촬영지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하였고, 나는 마추픽추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밀포드가 세계 최고라는 멋진 말에 반해 10년을 기다려서 기대가 크다.

사람이 인생에서 몇 번이나 이런 순간을 맞이할까. 정말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다.


밀포드 탐방 사무실에는 한국인 방문객이 많은지 공항에서 본 한국어 환영 문구와 서약서, 안내지 카드가 준비되어 있었다. 멀리까지 왔는데도 익숙한 글자를 보는 순간, 묘한 안도감이 들어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드디어 내일—
평생 한 번은 걸어보고 싶었던 그곳,
밀퍼드 사운드트랙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은퇴 후 모녀가 함께 걷는 여행은,
새로운 세계를 본다는 기쁨보다
서로의 마음을 다시 만난다는 사실에서 더 큰 의미를 찾게 된다.
남반구의 따뜻한 빛 속에서, 우리는 다시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한글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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