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밀퍼드 2 : 글레이드 로지에서 폼플로나 로지까지
뉴질랜드 밀포드 국립공원, 글레이드 로지의 아침은 유난히 분주하다.
6시 45분이면 모든 불이 켜지고, 7시가 되어서야 온수가 나온다. 식당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은 도시락 준비로 분주해진다. 늦게 가면 좋은 재료는 금세 동이 난다기에, 우리는 찬물로 급히 세수를 하고 손에 빈 도시락을 들었다.
'와우, 여러 가지 빵, 과일, 채소, 치즈, 햄, 잼, 쿠키와 젤리…. '
각자의 취향이 빵 위에 얹히며 하나의 샌드위치가 된다.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각자의 하루를 담은 도시락이 완성된다.
남녀노소 누구나 능숙하게 자신의 몫을 챙기는 풍경이 낯설고도 신기했다.
‘이건 우리나라에서는 참 보기 힘든 장면이겠구나’
아침 8시 반, 정원에 모여 우리는 안내인의 바로 뒤에서 출발했다. 첫날이라 넉넉한 재료에 욕심까지 보탠 탓에 배낭은 지나치게 무거워졌고, 걸음을 옮길수록 ‘적당함’의 중요함을 몸으로 배웠다.
숲은 제주 곶자왈을 닮은 검은 원시림이었다. 하늘은 보이지 않고, 이끼로 덮인 숲 바닥 사이사이로 화려한 꽃과 처음 보는 접시버섯들이 얼굴을 내밀었다.
문득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사리아의 숲길이 떠올랐다. 그때는 이렇게 누군가의 인도에 따라 걷는 길이 아니어서 훨씬 느리고 한적했었다. 그 여유가 잠시 그리워졌다.
나무 사이로 옥빛 계곡물이 반짝이며 흐른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작은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까지 또렷이 보인다.
그러나 이 길에서는 멈춰 설 수 없다. 앞의 두 명, 뒤의 두 명 안내인 사이를 벗어나선 안 된다. 멈추지 못하는 여행, 정해진 속도의 여행. 그 안에서 나는 또 ‘따라 걷는 삶’을 떠올린다.
맑은 물빛을 보며 홋카이도 청의 호수가 겹쳐졌다. 연초록의 숲과 검은 나무, 유난히 힘찬 물줄기. 모두가 연신 사진을 찍으며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 웃음 속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감탄이 들어 있었다.
멀리 그린톤 협곡 위 기암절벽에는 한여름 햇볕 아래에도 여전히 하얀 눈이 남아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았던 거대한 설산들이 떠올랐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 앞에서, 나는 자연의 균형이 얼마나 묵직한지 새삼 느꼈다.
국립공원 보호 구역이라 중간에 쉴 곳 하나 없다. 오늘은 우리 40명에게만 허락된 깊고 긴 숲길이 열렸다. 나는 이 길이 제주 치유의 숲보다 몇 배는 크고 깊은, 말 그대로 ‘비밀의 숲’처럼 느껴졌다.
지금 나는, 이 거대한 뉴질랜드의 원시림이 부러워지고 있었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작은 지를, 이 숲은 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지난 9월과 10월 매일 20km 이상을 걷던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후 10km 넘는 길을 걷는 것이 두 달 반 만에 처음이라 발바닥이 아파졌다. 불이 나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고, 나는 그제야 내가 아직도 걷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네 시간을 쉬지 않고 걸어 ‘Lunch’ 쉼터에 도착했다. 나무로 소담하게 지은 정자 아래에서는 먼저 도착한 사람들이 이미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함께 걷던 젊은 안내인들은 마치 식당 종업원처럼 분주하게 음료를 나누어 주었다. 차가운 주스와 따뜻한 커피가 그토록 고마울 수가 없었다. 딸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엄마, 산티아고 순례길도 이런 분위기야?”
“응. 매일매일 서로 ‘파이팅’ 하면서 걷지.”
"거기는 혼자 걷는다는 불안과 자유가 함께하지"
딸은 이 낯선 공동체 속에서 조금씩 어색함을 내려놓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어느새 여행보다 딸의 새로운 모습을 더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샌드위치와 뜨거운 커피를 먹고 나니 발의 통증도 잠시 잦아들었다. 신발을 벗고 싶었지만, 달려드는 샌드플라이 때문에 그대로 식사를 마쳤다.
햇살은 눈이 부시게 쏟아지고, 예보처럼 가는 비가 실처럼 스친다. 바람이 숲을 넘나들자 길은 오히려 더 걷기 좋아졌다.
겨울이 긴 곳이라 나뭇잎들이 뾰족한 침엽수들이 많아 바람소리가 크게 들리지 않고 진공상태처럼 조용했다.
모두들 서로 얼굴을 마주치면 이름표의 이름을 부르며 명랑하게 인사를 한다. 외국인들과 그룹 활동을 처음 하는 딸이 어색한지 엄마 혼자가 여행들과 비교하며 여러 가지 질문을 많이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와 밀퍼드 트레킹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평생 한 번이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준비한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세계 각국에서 모인 적극적이고 목적의식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드디어 목표를 이루고 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아침식사를 함께 먹은 영국인은
"한국에서 여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니?"
"아주 멀어 힘들었어. 나는 싱가포르에서 환승하였는데 14시간이나 걸렸어."
"나는 영국에서 21시간이나 걸렸지만 30년 만에 이곳에 오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어"
정말 그렇다. 산티아고 순례길도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하루 내 무거운 배낭을 메고 20~30km를 걸으며 모두들 힘들었지만 모두 즐겁게 인사하고 서로를 챙겼다.
'Hidden Lake 10m '라는 표시가 보인다. 10m가 아니라 10분 이상을 돌아 걸어야 한다. 더 걷는 게 힘든지 그냥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도 망설였지만 비밀의 호수라는 이름 때문에 안 보면 후회할 것 같아 옆길로 빠졌다.
깎아지른 듯 수직으로 버티고 있는 암석들의 협곡 위에 아직도 눈들이 그대로 있다. 그 눈들이 여름 더위에 녹아 폭포가 되고 떨어진 물들이 모여 시리도록 짙은 물빛의 호수가 되었나 보다. 정말 멋진 곳이다. 어떤 사람들은 손을 담그거나 발을 닦았다.
‘남들 따라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게,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을 놓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오늘의 숙소인 폼플로나 로지까지는 처음처럼 그린카펫 같은 원시림이 아니었다. 급경사 바위와 자갈 무더기를 넘고 넘어야 했다.
높은 고지 같은 곳에서 기어 올라오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던 안내인이
"마지막 5분!"
반갑게 웃으며 외친다. 한국, 산티아고 순례길, 밀포드, 어디에서나 힘든 산길을 오를 때면 길을 아는 사람들이 하는 말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얼마 남아있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5분보다 더 남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너무나 반가웠다. 나도 딸에게
"5분 남았데 조금만 더 힘내!"
하며 똑같은 거짓말을 했다. 어제 그레이드 하우스는 입구 평지에 있었지만 오늘 머물 폼플로나 로지는 18km 깊은 산중 하늘과 닿을 듯 솟은 바위 협곡 밑 숲 속에 포옥 숨어있다. 그런데 시설이 더 좋았다. 뭐든 헬기로 운반해야 할 텐데 더 고급스러운 것이 멋스럽다.
어제저녁식사는 연어와 사슴고기 스테이크와 애플파이와 아이스크림이 후식이었고 오늘은 꽃 등심스테이크에 설탕 에그 푸딩인데 맛있고 정성이 가득한 음식이다.
식사 후 브리핑 시간에 내일 저녁식사 메뉴 선택을 받았는데 전체 메뉴판이 영어와 한글 공용으로 되어 있었다. 이 먼 나라, 이 깊은 산골에서 어떻게 영어와 한국어 메뉴판 한 가지만 있는지 놀랍고 신기할 정도이지만 한국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루 내 함께 걸었던 사람들이 맞나 싶게 다른 모습으로 저녁식사를 하러 온다. 드레스나 깔끔한 일상복으로 편안하지만 자기만의 개성이 가득한 외모로 여유롭다. 딸과 나도 신경을 써서 다른 옷으로 입었다.
모두들 식사 후 카페에서 쉬다가 내일 일정 브리핑을 집중하여 듣는다. 질문이 많은데 긍정적이고 재미있는 제스처로 질문에 똑같은 반응으로 답을 해주는 개그맨 같은 안내인모습에 한바탕 웃음을 자아낸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친절이 몸에 밴 품위가 엿보인다.
이번 뉴질랜드 밀퍼드사운드 트레킹 4박 5일 트레킹에 비싼 값(230만 원)을 내는 만큼 음식, 숙소, 친절한 안내에 최선을 다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밀퍼드사운드 트랙 트레킹에서 원시림 걷기와 함께 세계 다양한 사람들의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며 배우고 있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은 듯 다른 여러 모습을.
나는 이 길에서 숲만 걷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딸과 함께 걷고 있었다. 같은 숨의 속도로, 같은 오르막 앞에서 주저하며, ‘5분이라는, 조금만 더 힘내’의 거짓말에 기대며.
하루가 저문다.
밀퍼드의 숲은 더 깊어지고, 내 안의 시간도 함께 내려앉는다.
세계는 여전히 넓고,
가고 싶은 곳은 여전히 많고,
나이가 들수록
나는 자꾸 배워야 할 사람이 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나는 다시 엄마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