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의 밀퍼드 4 : 퀸틴로지에서 마이티 픽 로지까지
아더스 계곡에서 보트 셰드로 이어지는 길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얼굴로 나를 맞이한다.
원시의 숨결을 간직한 숲은 무심하게 오르락내리락 이어지고, 시야는 거대한 암석 협곡과 이끼 낀 고목, 이름 모를 돌덩이들로 빽빽하게 채워진다. 자연은 친절을 베풀지도, 구태여 제 존재를 설명하려 들지도 않는다. 그저 태초부터 그러했듯 묵묵히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바윗길 언덕을 한참 내려오자, 잊고 있던 통증이 발바닥 끝에서부터 욱신거리며 올라온다. 뜨겁게 달아오른 발이 꽉 죄는 등산화 속에서 퉁퉁 부어오르는 느낌이 걸음을 붙잡는다.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구원처럼 '덤플링 헛'이 시야에 들어온다. 반가운 마음에 무거웠던 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관리원은 곧 물자를 나르는 헬기가 도착하니 구경하고 가라며 권한다. 하지만 마음은 머물지 못한다. 이제 딸은 적응이 되었는지 앞서 서두른다.
오늘은 이번 트레킹 중 가장 긴 구간인 21km를 주파해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보다 마음의 재촉이 더 크고 바쁘다. 다시 신발 끈을 조여 매고 길 위로 몸을 맡긴다.
비가 온다는 예보가 무색하게 날씨는 지독히도 평온하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걷기에 더없이 완벽한 공기. 여행의 절반은 날씨라는데, 이번 여정엔 보이지 않는 행운이 깃들어 있다.
“하늘이 흐린 걸 보니 오늘은 비가 오려나?”
누군가 툭 던진 한마디가 이끼 가득한 원시림 습기를 머금은 바람에 실려 간다.
밀퍼드는 뉴질랜드사람들처럼, 그 사람들을 닮은 샌드플라이들처럼 엄격하다. 자연보호를 위해 중간에 편히 앉아 쉴 곳도, 도시락을 펼칠 마땅한 자리도 내어주지 않는다. 오늘의 구간은 잠깐이라도 멈춰 서면 어디선가 시커먼 샌드플라이 떼가 굶주린 듯 달려든다. 가만히 서 있는 일이 걷는 것보다 힘든 역설의 구간이다.
그때, 멀리서 거대한 폭포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출렁다리를 건너자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물소리에 섞여 점점 커진다.
맥케이 폭포다. 수직으로 쏟아지는 하얀 물줄기와 제멋대로 흩어진 돌무더기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장관이다.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길을 벗어나 폭포를 향해 달린다.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차가운 물속으로 뛰어드는 이들, 햇살 아래 젖은 몸을 누이고 미친 듯 소리 지르며 웃는 이들. 그곳엔 순수한 야생의 즐거움만이 가득하다.
나 역시 불붙은 듯 뜨거워진 등산화를 벗고 개울에 발을 담근다. 찰나의 침묵.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은 발등에 닿자마자 얼음처럼 날카롭게 파고든다.
“앗, 차가워! 저 사람들은 뭐지?”
비명을 지르며 발을 뺐지만 입가엔 웃음이 걸린다. 타오르던 발바닥의 통증이 순식간에 씻겨 내려가고, 그 자리엔 시원한 휴식이 풍족하다.
또다시 샌드플라이들이 덤벼들고 허겁지겁 도시락을 비웠다, 다른 사람들은 샌드플라이가 당연하다는 듯 끔적하지 않고 식사를 즐기고 있다. 아마 저들은 이런 뉴질랜드 밀포드조차 즐기나 보다.
다시 보트 시간을 향해 경보하듯 길을 나선다. 수영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서둘렀다 생각했는데 시곗바늘은 벌써 오후 네 시를 가리키고 있다. 뒤돌아보니 어느 사이 물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이 바로 뒤에 있었다.
'정말 흥이 많고 걸음이 빠르다!'
아다 호수 보트 셰드에서 쾌속 보트에 몸을 싣는다. 물보라를 일으키며 호수를 가르는 보트 안, 나이 지긋한 신사부터 아이들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함성을 내지른다. 피로를 압도하는 환희가 모두의 얼굴에 피어오른다.
“엄마, 호수 건너 숲 밖은 해가 쨍쨍해. 여기는 나무가 많아서 어두운 거였어.”
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온통 진초록인 줄만 알았던 세상이 조금씩 결을 달리하고 있었다. 갈색으로 변한 고사리 잎, 절벽 위 나무들 사이로 수줍게 비치는 붉은 기운. 밀퍼드에도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마지막 숙소인 ‘퀸틴 로지’는 규모가 큰 리조트 같다. 창밖으로는 파도와 하얀 배들, 그리고 요트가 가득한 선착장, 넓은 정원이 펼쳐진다.
며칠간 오직 두 발로만 만났던 원시의 세계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 위로 우뚝 솟은 1,692미터의 마이터 픽이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우리를 내려다본다.
오늘은 마지막 밤, 일행들의 얼굴엔 평생소원이었던 밀포드 완주의 자부심이 훈장처럼 박혀 있다. 근사하게 차려진 양갈비 스테이크는 입안에서 눈 녹듯 사라진다.
오랜 꿈이었던 밀퍼드 사운드 트레킹. 그 꿈의 문장을 딸의 손을 잡고 함께 마침표 찍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러했듯, 함께 걸었던 세계각국 40명의 동료가 뿜어내던 긍정의 에너지는 이제 내 삶의 동력이 될 것이다.
밀퍼드 사운드의 그 신비로운 초록은 이제 내 마음 깊은 곳에 영원한 풍경으로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