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마운틴 쿡의 후커 벨리, 테 카포 호수와 온천
쿡의
3,754미터, 마운트 쿡(Mount Cook)은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숫자를 마음속에서 천천히 굴리며 올려다본다.
예전 같으면 높이와 걸리는 시간을 먼저 알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오래 바라본다. 거대한 자연의 시간 앞에서 나의 지난 세월은 작은 자갈처럼 느껴진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암벽은 기골이 장대한 장군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오히려 그 침묵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무뚝뚝한 어른 같아. 말 걸면 혼날 것 같지 않아?”
“응. 대신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할 것 같아.”
마운트 쿡의 뮐러 빙하 풍경이 최고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눈앞의 풍경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얼음과 바위, 물과 바람이 서로를 밀고 당기며 만들어낸 장면 앞에서 말은 자꾸만 없어졌다.
아오라키 국립공원의 젖줄과도 같은 후커 밸리 트랙(Hooker Valley Track)은 하이커들의 성지이자, 후커 밸리 트랙은 이 국립공원에서 가장 상징적인 길이다. 그래서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옷차람의 사람도 많았다.
그 길 위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다. 밀퍼드를 함께 걸었던 유일한 일본인 부부를 퀸즈타운 호텔에서 만났었는데 오늘 이 길 위에서 또 마주쳤다.
우리는 너무 반가워 인사를 했다. 나고야에서 왔다는 남매처럼 닮은 부부의 은퇴여행이 보기 좋았다. 그들은 항상 자석처럼 붙어있고 다소곳하고 바지런했다.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아도 되는 날에는, 사람들 사이를 걷는 일조차 풍경이 된다. 자갈을 밟을 때마다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서늘한 감촉이 일정의 감정과 속도를 정해준다.
“엄마, 오늘은 이렇게 걷는 속도 괜찮아?”
“응, 오늘은 넉넉한 시간이 우리 편이잖아.”
딸은 대답 대신 미소를 건넸다. 여름인데도 바람은 날카로웠다. 밀퍼드 사운드의 고된 트레킹을 견뎌낸 딸아이가 씩씩하게 앞서 나간다. 돌풍이 불 때마다 다리가 휘청이고 뺨을 때리는 찬 공기에 정신이 번쩍 든다.
뉴질랜드의 여름은 변덕스러운 연인 같다더니, 오늘은 유독 매섭다. 하지만 자갈길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서걱서걱' 경쾌한 마찰음과 손끝에 스치는 야생화의 까슬한 감촉이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일깨워준다.
세 개의 출렁다리를 건널 때마다 발밑에서 입 벌리며 울고 있는 것 같은 계곡물의 진동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협곡 사이로 몰아치는 바람이 옷자락을 꽉 움켜쥐고 마구 흔들었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중심을 다시 잡아야 했다. 딸이 한 발 앞서며 말했다. 밀퍼드에서 처럼
“바람이 밀면 싸우지 말고, 천천히 다독이며 함께 걸어가면 되지.'
“여기가 영화 반지의 제왕 촬영 지래. 그리고 우리나라 트래킹 전문 ㅎ여행사의 최고 광고지.”
“사진보다 실제가 더 멋지고 굉장하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이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인 순간이었다.
자갈길이 끝나고, 나무 결을 살린 데크 길이 나타났다. 발걸음이 부드러워지자 마음도 느슨해졌다.
“비 오는 날은 밀퍼드, 햇살 좋은 날은 후커 밸리라더라.”
“근데 우리는 반대로 왔네.”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거겠지.”
세 개의 다리를 지나자 후커 호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탁한 옥빛 물결이 바람에 부딪혀 철렁이며 흔들렸다. 차가운 수면 위로 바람이 일 때마다 흩어지는 물안개에서 태고의 냄새가 났다. 빙하가 녹아 바위를 깎고, 자갈을 끌고 내려와 만든 색이었다.
“겨울엔 저기 빙하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닌대.”
“그러면 호수도 지금보다 말이 없겠네.”
겨울이면 둥둥 떠다닌다는 거대한 빙하 조각들을 상상하니, 새파랗던 아르헨티나 페리토 모레노 빙하들이 펼쳐졌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펑펑 포효하며 바다로 뛰어들던 눈덩어리들을 보는 듯 서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마운트 쿡의 여운을 안고 테카포 호수(Lake Tekapo)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달리는 내내 창밖으로는 만년설과 연초록 수풀, 그리고 이름 모를 보랏빛 야생화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선한 목자의 교회는 작은 호숫가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자동차 창문을 통해 보이는 마운트 쿡의 흰 정상은 액자처럼 가지런했다. 잠시 제주 섭지코지를 처음 걸었을 때가 생각났다. 영화나 드라마의 촬영지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이다.
좁은 석조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나무 냄새와 정적이 섞인 공기가 나를 감싼다. 작은 제단 뒤 창문은 액자가 되어 마운트 쿡의 흰머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젊은 목사님과 기념품 판매가 눈에 띄었다.
제주 방주교회의 고요함과 전남 신안 섬티아고 작은 성당소박함이 교차되며 비로소 관광지 같다는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작년 산티아고 순례길 화려한 스페인의 대성당에 익숙하던 무렵, 길 비 오는 날 시골길에서 만났던 아주 작은 성당이 생각났다.
온몸이 흠뻑 적었던 순례자들을 기도로 맞아주며 목걸이를 걸어주었던 키 작은 할머니 수녀님. 그때처럼 낮은 곳에서 나지막이 기도를 해야 들어줄 것 같은 이런 작은 공간에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여긴 아담해서 편안하다.”
“엄마는 요즘 크고 화려한 곳보다 이런 소박한 곳을 좋아하네.”
“이제는 조용하고 따뜻한 풍경이 좋더라.”
여정의 마침표는 테카포 스프링스의 뜨거운 온천이었다. 키 큰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둘러싸 바람을 막아주는 노천탕에 몸을 뉘었다. 뺨은 시베리아의 칼바람처럼 차가웠던 후커계곡의 바람을 기억하는데, 어깨를 감싸는 물은 아주 맑고 따뜻하다.
물결 너머로 보이는 투썸 산맥의 낮고 부드럽고 짙은 모습을 바라보며, 오전 트레킹의 피로를 옥빛 호수 속으로 흘려보냈다.
생각보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감싸고, 피부 위로 김이 천천히 올랐다. 숲에서는 솔잎 향과 서걱서걱 나무들 춤추는 소리가 났고, 멀리 호수는 여전히 청옥빛으로 누워 있었다. 가끔 바람이 후루루 불어도 물속은 나를 도닥이며 고요했다.
문득, 추운 겨울 산을 내려와 야외 온천에 몸을 담갔던 여러 산행 기억이 겹쳐졌다. 장소는 달라도, 오랜만에 몸이 기억하는 안도감은 반가웠다.
밤 9시가 넘어도 하늘은 밝았다. 흐린 날씨에 쏟아지는 별을 볼 순 없었지만, 대신 세렝게티의 밤하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때 정년퇴직은 먼 이야기 같았는데 어느 사이 와버렸다. 벌서 6개월이 지났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산티아고와 호주, 뉴질랜드의 아름다운 풍경 속으로 여유 있게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오늘 어땠어?”
“수 십 년 꿈꾸었던 뉴질랜드 후커밸리, 그 길에서 환영하는 바람 덕분에 천천히 걸을 수 있어서 좋았어.”
여행은 긴장으로 굳어있던 어깨를 풀고 나의 속도를 낮추고, 이름 모를 들꽃의 향기에 발을 멈출 줄 아는 사람을 데려온다.
그리고 그 기분 좋은 변화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몸이 알고 있었다.
와 온천여행 뉴질랜드 8. 마운틴 쿡의 후커 벨리, 테 카포 호수와 온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