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길 42, 뉴질랜드 9-남섬 안녕

엄마와 딸, 트와이젤에서 퀸스

by 지구 소풍 이정희

:

뉴질랜드 남섬 중부, 와나카에 온다면 망설일 필요 없이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엄마, 여기 오면 라벤더 팜은 무조건 가야 해.”

"와… 진짜 보라색 파도 같아.”

딸은 사진을 찍느라 연신 쪼그리고 섰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그만 찍어. 너 지금 라벤더보다 더 많이 흔들리고 있어.”

“여행 와서 이 정도는 기본이지.”


이곳의 꽃밭들은 11월부터 2월까지 여름의 태양 속에서 가장 짙은 보라색으로 흐른다. 작은 농장 가득 라벤더가 물결치고, 그 사이사이 여름 햇살을 머금은 백합들이 고요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꽃들은 마치 “이제야 왔구나” 하고 사람을 기다려온 듯 보였다.


지난여름 홋카이도 후라노의 팜 도미타에서 마주했던 화려한 꽃 축제를 떠올리면, 이곳은 분명 소박하다.

하지만 척박한 뉴질랜드 남섬에서의 마지막 날, 이 라벤더 팜은 과분할 만큼 소중한 선물이었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꽃다발을 한 아름 건네받은 기분이랄까.


라벤더 향에 취한 벌들이 낮게 윙윙거리며 날아다녔다. 그 소리에 순간 몸이 굳었다.

밀퍼드 사운드에서 겪었던 지독한 샌드플라이의 기억이 불쑥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직도 손발 곳곳, 열 군데쯤 남은 가려움과 흉터가 그 여름을 증언하고 있다.

“아, 그 샌드플라이? 아직도 가려워?”

나는 양말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여기만 봐도 열 군데는 넘는다.”

“와… 그럼 여행 전리품이네.”

딸은 웃었지만, 나는 진지했다.


하지만 이곳의 벌들은 달랐다. 오직 라벤더에만 충실할 뿐, 사람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괜한 경계심이 머쓱해질 만큼 평화로웠다.

“얘네는 매너가 있네.”

“뉴질랜드 벌은 신사인가 봐.”


농장 한편에는 라벤더로 만든 비누와 향수, 화장품, 꿀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인위적인 화려함 대신, 정직해 보이는 질감과 향이 마음을 끌었다.

한국처럼 적극적으로 라벤더 꿀 시식을 권해서 먹어보았는데, 달지 않고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 인상적이었다.

많이 사고 싶었지만, 여행 가방과 마음의 여백을 남겨두기로 했다.

와나카의 또 다른 상징, ‘와나카 나무(That Wānaka Tree)’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타운 중심에서 호숫가를 따라 로이스 베이 방향으로 몇 분만 걷다 보면, 물속에 홀로 서 있는 작은 나무와 그 나무를 사진에 담기 위해 늘어선 사람들의 긴 줄이 보인다.

“엄마, 우리도 줄 설 거야?”

“왔는데 안 서면 억울하지.”

“이 나무가 그렇게 유명해?”

“사람들이 유명하게 만든 거지.”

그 긴 줄 끝에 서며, 나도 잠시 이 풍경의 일부가 되었다.


오타고 지역 주민들에 따르면, 이 나무는 원래 울타리 기둥에 불과했던 작은 버드나무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 나무를 ‘희망의 나무’라 부르지만, 내 눈에는 왠지 ‘고독한 나무’처럼 보였다.

넓은 호수와 드넓은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서 묵묵히 시간을 견뎌온 한 존재. 그 고요함이 오히려 위로가 되었다.


와나카를 감싸 안은 남섬의 풍경 가운데서도 서던 알프스는 단연 압도적이다. 남섬의 등줄기처럼 뻗은 이 산맥은 와나카에서 아서스 패스까지 약 500km 이어진다.

우리나라의 태백산맥을 떠올리게 하는, 땅의 골격 같은 존재다.

“엄마, 진짜 땅이 숨 쉬는 것 같아.”

“그래서 사람들이 자연 앞에서는 겸손해지는 거야.”


마운트 쿡을 지나 캔터베리 대평원으로 물 흐르듯 수정처럼 맑은 테카포 호수와 온천, 푸카키 호수, 와나카의 라벤더 팜, 퀸스타운의 와카티프 호수, 그리고 밀퍼드 사운드까지.

남섬은 한 장의 풍경이 아니라, 숨이 멎을 만큼 연속되는 장면들이었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

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힘들지 않을까?”


서던 알프스 정상에 일 년 내내 쌓인 눈은 강과 빙하로 흘러들어 남섬의 호수를 만들고, 이 땅을 두 개의 서로 다른 기후로 나눈다. 자연은 이렇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섬의 운명을 결정짓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북섬, 오클랜드를 향해 떠난다.

짐은 가벼웠지만, 마음은 묵직했다.

라벤더 향과 딸의 웃음소리가 와나카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을 북쪽으로 돌린다.

뉴질랜드의 북섬, 중심 도시 오클랜드를 향해.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여전히 와나카의 보랏빛 향기가 남아, 쉽게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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