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길 44, 뉴질랜드 11

엄마와 딸, 오라 케이 코라코 동굴과 지열공원

by 지구 소풍 이정희

뜻밖의 선물 '오라케이 코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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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가늘고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의 거친 품에 안기길 고대하며 이곳 투랑기(Turangi)까지 달려왔건만, 위대한 산은 허락 대신 '입산 통제'라는 차가운 답을 내놓았다.

내일은 강풍까지 예보되어 있다니. 야속한 마음에 젖은 창밖만 바라보다 결국 우리는 산이 아닌 다른 길을 택하기로 했다. 인생처럼 여행도 늘 그렇듯, 계획처럼 되지 않고 그 자리에 뜻밖의 선물이 숨어 있으니까.


비가 와도 그 본연의 생명력을 잃지 않는 곳, 뉴질랜드 지열 활동의 정수라 불리는 ‘오라케이 코라코(Orakei Korako)’를 찾아냈다.

로토루아와 타우포, 해밀턴 그 사이 지도상으론 중심이지만 실제론 꽤나 깊숙이 숨어 있는 이 'Hidden Valley'는 외진 덕분에 단체 관광객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롭다고 한다.


보슬비가 내리는 이곳에 오기까지 지나는 자동차를 하나도 못 보았다. 혹시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이정표를 여러 번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았지만 구글 앱에 의존했다.

적막함이 쌓여 있는 이곳에 도착하자, 비에 젖은 흙내음이 유난히 진하게 코끝을 찔렀다. 장마철의 우리 동네처럼.


오하쿠리 호수 매표소에서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불과 100m 남짓한 물길을 건넜다.


"통통배 운전하는 털보 선장 보았어? 어디서나 털보선장들은 비슷하게 생겼지?"

"엄마는 자세히도 보았네.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는데---"

모녀의 관찰력은 이렇게 사소한 데서 잘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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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이 통통 떨어지는 호수의 물길을 가르며 선착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진한 유황냄새로 공기의 농도가 또 달라졌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상상하지 못했던 야생의 거친 팔레트였다. 아프리카 모로코 페스 천연 염색장인 테너리의 화려한 팔레트 색감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나에게 야외 온천의 정석 같은 일본이 대부분 정갈하게 가꿔진 온천이라면, 이곳은 땅이 살아 뱉어내는 거친 숨결 같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다 ‘톡 톡 톡 ’ 하고 터지는 화산 기포들의 색깔들은 유화물감의 그러데이션처럼 오묘하고 진했다.


탐방로 바로 옆까지 밀고 들어온 뜨거운 열기와 유황 냄새는 주변의 나무와 돌들을 기이한 빛깔로 물들여놓았다.

1961년의 기록 안내를 보며 멈칫했다. 댐 건설로 수면이 18m나 높아지면서, 이 경이로운 화산 지대의 75%가 물속으로 영영 사라졌다고 한다.


'그전에는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도무지상상이 되지 않네?'


하지만 가라앉은 대지는 그대로 죽지 않았다. 지금도 차가운 호수 밑바닥에선 뜨거운 가스 거품이 끊임없이 솟구치며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 끈질긴 생명력의 증거인 뿌옇고 매스꺼운 하늘을 보며, 문득 한겨울 미세먼지에 갇혀 숨 가빠하던 한국의 하늘이 겹쳐 보였다. 태초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려 일부러 손을 대지 않으며 애쓰는 뉴질랜드의 인내심이 부러워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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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그린을 지나 ‘레드 루트’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거대한 동굴 하나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어두운 절벽색으로 깊게 파인 그 공간은 단순한 구멍이 아니라 지구 깊은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 같았다. 보고만 있어도 압도당하는 신비함, 그리고 그 너머의 어둠이 주는 정체 모를 두려움이 달려들었다.

세계적인 여행 잡지 '론리 플래닛'이 왜 이곳을 "뉴질랜드에 남아 있는 최고의 온천 지역"이라 극찬했는지 온몸으로 실감했다.


"야, 우리가 진짜 운이 좋다. 통가리로는 아무나 가는데, 이 비 오는 날 '숨겨진 계곡(Hidden Valley)'을 찾아오는 건 진짜 모험가들만 하는 거거든."

"에이, 비 와서 못 간 거잖아~"

"이렇게 비 맞으면서 걸으니까 이제 공기가 훈제향처럼 입맛을 당기는데!"


머드 풀과 코끼리 바위를 지나는 동안 정갈하게 깔린 데크 길은 인간의 손길을 최소화하며 우리를 원시적인 고사리 숲으로 안내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중간중간 마주친 한글 안내판이었다. 이 먼 이국땅의 비밀스러운 계곡에서 한국사람대신 만난 한글은 예상치 못한 다정함으로 다가와 비에 젖은 온몸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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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반 남짓한 산책을 마치고 텅 빈 선착장에서 배를 부르는 벨을 눌렀다. 어느 사이 저 멀리서 인상 좋은 털보 선장이 운전하는 통통 보트가 기다렸다는 듯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다가온다. 카메라 렌즈엔 도저히 담기지 않던 그 압도적인 현장감을 가슴에 꾹꾹 눌러 담았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터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다시 숙소로 돌아오며 운전하는 내내 마음은 여전히 구름 뒤에 숨은 통가리로를 향해 있었다.


'아, 이제 어쩌지. 내일 일정은 어떡하지...'


잠시 순하여 잦아질 듯하던 비는 걱정만큼 자동차 창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오늘 숨은 오라케이 코라코의 뜨거운 열기를 확인했으니, 내일은 통가리로의 거친 대지도 나를 기꺼이 받아주길 간절히 바라본다.


'통가리로 국립공원이여, 부디 내일은 그대의 길을 열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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