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딸, 로토루아의 폴리네시안 스파와 호빗 마을
아름다운 호숫가에 자리 잡은 폴리네시안 스파는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고급스러운 여러 종류의 스파 시설과 유황 성분의 온천수가 건강에 효과가 있어 세계적인 여행 전문지(UK Conde Nast Traveller Magazine)에 의해 지속적으로 세계 10대 스파에 선정되고 있다고 한다.
오전 9시 개장에 맞추어 폴리네시안 스파에 갔다. 관광객은 우리뿐이고 현지 노인들이 회원 카드를 들고 긴 줄을 서있었다.
그들은 서로 경쾌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했다. 노인들은 젊은 직원들의 정중한 인사를 받으며 옷을 갈아입고 온천 수영장에서 인어가 되어 수영과 아쿠아빅을 즐겼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우리나라와 비교되며 놀랍기도 하고 여러 가지 부러웠다.
“저분들 정말 대단하다. 아침부터 운동을 하네.”
“엄마, 저 나이에도 저렇게 사는 거 멋있지 않아?”
늙음이 조용히 움츠러드는 시간이 아니라, 여전히 몸을 쓰며 살아가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놀랍고도 부러웠다. 고급 스파가 특별한 사치가 아니라 일상의 일부인 작은 마을의 풍경 속에서 노인들의 태도는 당당했고, 그 환한 표정은 햇빛보다 눈부셨다.
하늘과 호수, 온천수의 색깔이 맑고 부드러웠다. 바람에 이리저리 쏠리는 유황의 냄새는 편안한 휴식을 주었다.
지팡이를 짚고 한 발씩 걷는 어머니를 보살피는 희끗한 머리의 아들과 어린 손자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3대가 선한 사람들 같았다.
'저 사람들 봐. 세 식구가 같이 왔나 봐. 드물게 보는 모습이다!'
26개의 광천수 유황 지열 온천에서 두 시간 넘게 23일의 여행 피로를 녹이며 편안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고급스러운 풍경과 여유로운 사람들 때문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오전 스파를 마치고 북쪽 오클랜드를 향해 두 시간 정도 운전하면 초록빛 농장 지대인 와이카토 지역에 도착한다. 다른 곳과 다른 지형이 여느 소설에 등장하는 곳인 듯 유난히 정겹게 느껴진다.
“엄마, 진짜 영화 같다. 여기가 바로 그 영화 찍은 데야. 기억나?”
양과 소, 말 목축으로 유명한 이 지역의 푸른 목초지와 구릉진 언덕을 보면 왜 반지의 제왕 및 호빗 마을(Hobbiton), 그리고 샤이어(The Shire)의 촬영지로 선정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곳은 영화 <반지의 제왕> 3부작과 <호빗>의 촬영 현장인 호비튼 무비 세트가 보존되어 있어 매일 투어가 예약 진행되고 있다. 호빗 마을 입구에서 2시간 남짓 가이드 투어를 하였다. 평일인데 15분 단위로 대형버스에 40명씩 관람자가 많아 혼잡했다.
초록빛 언덕 사이로 버스가 미끄러지듯 내려가자 호비튼 무비 세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멀리서 보면 평범한 목초지인데, 가까이 갈수록 언덕 속에 숨겨진 둥근 문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현실의 농장이 아니라 누군가 오래전부터 상상해 온 세계가 땅속에서 천천히 떠오르는 듯했다.
가이드 투어는 버스 안 TV를 통하여 영화감독과 제작자의 이야기와 주제음악으로 시작한다.
이곳은 반지의 제왕과 호빗이 만들어진 자리라고 했다. 가이드는 촬영 당시 이야기를 들려주었지만, 설명보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언덕 위를 흐르는 바람이었다. 잔디는 일정한 방향으로 눕고 다시 일어섰다. 마치 누군가 방금 지나간 자리처럼 길이 이어졌다.
그림 같은 풍경의 목장을 달리며 아름다운 전망을 감상하며 영화의 여러 장면들을 떠올리게 된다.
프로도와 빌보의 모험이 시작된 백 엔드를 비롯하여 다른 44개의 호빗 집들을 둘러보고, 실제 실내에 들어가 영화 속 소품들을 관찰하며 더 놀라게 된다.
둥근 초록 문 앞에 서자 갑자기 스케일이 낯설게 느껴졌다. 문은 사람보다 작았고 창문은 낮았다. 허리를 조금 숙이고 서 있어야 했다. 나는 문손잡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곳에서는 어른도 잠시 작아진다. 그래서인지 세트장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 들었다.
언덕 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집 앞에서 가이드는 말했다. 이곳이 빌보 배긴스와 프로도 배긴스가 살던 집이라고. 관광객들은 줄을 서서 사진을 찍었지만 나는 한 걸음 물러나 서 있었다. 초록색 문과 노란 꽃, 낮은 돌담이 제주 시골마을처럼 보였다.
마을 사이 길을 따라 걷자 작은 정원들이 이어졌다. 빨랫줄에 걸린 셔츠, 창가의 빵 바구니, 삽과 장화 같은 소품들이 마치 지금도 누군가 살고 있는 집처럼 보였다. 문은 닫혀 있었지만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세트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꾸 문을 두드리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길 끝에서 개울이 나타났고, 낮은 돌다리를 3-4개를 건너자 마을이 내려다 보였다. 작은 연못물 위로 햇빛이 부서지고 그네와 나무 가지가 흔들렸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잎사귀들이 작은 파도처럼 움직였다. 영화의 장면 같았다.
샤이어 마을을 걷다 보면 호비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세트가 어떻게 세워졌는지 장소에 따라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안내인의 영어 설명이나 앱 설정으로 한국말로 읽을 수 있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들른 그린 드래건 인에는 여행자들이 연못옆 나무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파티를 하던 그린 드래건 인(The Green Dragon Inn)이 이제는 쉬는 카페가 되었다.
관람객들은 여유롭게 호빗 마을에서 생산된 시원한 음료(맥주, 진저비어 등)를 무료로 먹으며 30분 정도 휴식을 즐기게 된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영화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하나쯤은 이런 마을이 있기 때문이다.
'20년 전의 영화를 보며 상상했던 것들이 현실에 펼쳐졌다!'
언덕을 떠나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둥근 문들은 다시 잔디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분명히 걸었던 길이 꿈처럼 멀어졌다.
아마도 호비튼은 실제 장소라기보다 잠시 머물다 나오는 상상의 나라에 더 가까운 곳일 것이다. 그리고 그 상상은 여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 남아, 현실의 풍경 위에 조용히 겹쳐질 것만 같았다.
2004년 '반지의 제왕' 영화 기억이 이제는 희미한 나, 아직도 확연히 추억하는 딸은 뉴질랜드 여러 곳의 촬영지(밀퍼드, 마운틴 쿡, 통가리로, 트와이젤,---)를 여행하며 추억을 함께 할 수 있어 의미가 정말 깊었다.
우리가 보름 동안 즐겼던 신기하고 경이로운 뉴질랜드는 조국을 사랑하여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던 무명 영화감독의 '반지의 제왕' 제작이라는 꿈이 실현되어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영화감독인 박찬욱, 봉준호의 여러 작품들, 유명 K 드라마의 촬영장과 소품들도 이렇게 개발 보존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