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1시부터 잠에서 깨어 신경이 날 선다. 낯선 환경에 깊은 잠을 못 잤다. 맞은편 남자분도 잠을 못 자는 것 같았다.
코 고는 소리가 삼중주처럼 들린다. 5시가 되자 여기저기 바스락거리며 짐 챙기는 소리가 들린다.
어차피 잠은 못 자니까 1층 식당으로 내려가 일찍 출발하는 사람들을 보고 싶었다.
'아, 어둠 속에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우리나라 단체팀 등은 대부분 중년으로 벌써 이른 조식을 먹고 짐을 맡기고 5시 반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지런한 한국인들이다.
외국인들은 한국 팀보다 나이가 더 많은 노년이 대부분인데 6시부터 한, 두 명씩 출발을 했다. 비도 오고 쌀쌀한 날씨에도 반팔, 반바지에 판초를 입고 헤드랜턴을 켜고 스틱까지 완전 장비를 갖추었다.
한국 단체의 동키 서비스에 맡긴 짐이 엄청 크고 규모가 대단하다. 마치 히말라야 원정대 같았다.
한국 사람들의 분주한 말소리에 외국인 여성이 시끄럽다고 큰소리로 따졌다.
한국 가이드가 너는 왜 이렇게 더 큰소리로 말하냐며 문을 꼭 닫고 자라며 같이 대꾸를 했다.
'와, 둘이 똑같이 대단하다'
8시가 되자 알베르게는 조금 전과는 달리 침묵의 공간이 되었다. 연박을 하는 두 사람만 남았다.
순례자 여권을 받으러 사무실에 갔다. 가는 길에 순례자들을 위해 문이 활짝 열린 성당에서 이번 여행의 무사함을 기도했다.
순례자 사무실에는 비가 와도 사람들이 많았다. 나이가 많은 봉사자들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순례길 지도를 받았다. 오늘 방문자 표를 보니 미국인 다음 한국인들이 많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마을을 천천히 걸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이 되는 피레네산맥 산등성이가 온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산봉우리에 구름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새벽 비에 흠뻑 젖은 전원 마을은 차분함을 더한다. 흙의 기운이 올라오고 초록 수풀의 싱그러움이 코끝에 와닿는다. 연둣빛 편백나무 잎들이 무럭무럭 자라며 풀냄새를 진하게 낸다.
여기저기 넓은 목장이 많이 보인다. 양 떼들이 조형물처럼 꼼짝하지 않는 것이 자는 듯 보인다. 이방인을 따라 고개를 돌리며 눈을 맞추는 소떼들은 이곳의 주인답다. 붉은 지붕의 하얀 집들이 예쁜 화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스위스 시골 마을에 와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눈물이 날 정도로 좋아서 웃고 싶은데 슬픈 것은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어제저녁 도착하여 숙소까지 걸었던 작고 소박한 마을 생장이 아니었다.
생장 성곽
옛 나바론의 오래된 성곽이 꽤 규모가 크다. 성 안에 큰 학교 건물이 있고 야외 전시와 전망대가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꾼들이 아닌 일반 단체 관광객들의 투어가 진행되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얼굴을 보이니 하늘이 맑고 상쾌하다. 높은 산 아래 마을이라 날씨 변화가 심한가 보다.
내일 새벽 걸을 오리손 산장 가는 길을 미리 확인하였다. 정오인데 지금 산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론세스까지 26km 먼 거리인데 일정이 걱정이 되어 물어보았다. 오늘은 8km 거리에 있는 오리손산장에서 잔다고 한다. 오리손산장은 산 중간이라 풍광이 뛰어난 곳이라 예약이 힘든 곳인데 부러웠다
성곽 돌담길을 굽이굽이 걸으며 마을로 내려오는데 입구에 프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여행 가면 그곳의 시장 탐방을 정말 좋아하는데 오늘은 운이 정말 좋은 날이다.
마을 사람들이 직접 만든 메주처럼 생긴 투박한 덩어리 치즈, 맛깔 좋은 참치 뱃살 같은 돼지고기인 하몽, 미남 청년의 수제 에스프레소 커피, 할머니가 갓 구운 크루아상 빵, 여러 가지 와인이 판매되고 있어 있었다. 4유로에 빵 3개를 사고 1유로에 수제 커피를 사 먹었다.
따뜻하지 않아도 바삭하고 맛이 진하다. 어제 파리에서 먹었던 싸고 맛있었던 빵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에 여행이 더 즐거워진다.
빈 숙소에서 오늘 연박을 하며 뭐 하지 했던 걱정은 생각지도 못한 여유와 자유, 충만함을 선물처럼 주고 있다.
그렇다. 지금까지 시간을 쪼개어 치밀하게 계획하고, 더 많이 욕심을 부리던 가성비 있는 여행은 이제 하지 않아도 된다.
퇴직이 주는 여유로운 감성여행
생장에서 멈춤의 여유!
어제저녁 잠시 본 작은 생장이 아니었다. 오늘 새벽 출발했으면 알 수 없었던 경험들이다.
다시 한번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내일부터는 진짜 고생길 시작이다. 제일 힘들다는 피레네산맥 오르막과 내리막 24km를 걸어 론세스바에스에 도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