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 21,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21.

빌라 블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서 아헤스까지(15.7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오랜만에 다양한 지형을 만나는 날이다. 어제까지 평탄한 도로와 나란히 걷거나 해바라기 밭 사이 자갈길을 걸었다.

그런데 오늘은 난이도가 높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비 오는 새벽, 숙소 옆 빌라 블랑카 몬테스 데 오카 성당부터 급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다 아침 8시에 출발했다. 작은 마을 '빌라 블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 붉은 해와 구름들이 가득 어울려 형형색색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멈추어 뒤돌아보며 알게 된 아름다움이다. 저렇게 멋진 세상을 사진으로 담느라 시간을 보내면 며칠 사이 오가며 보았던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프랑스 동갑내기 교사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정에 쫓겨 새벽 일찍부터 빨리 걷는다. 대강 8시부터 천천히 걷다 멈추곤 하니 어제 보았던 그들과 다시 만날 일은 별로 없다.

외국인들은 중노년이 많아 나처럼 천천히 걷고 하루 20km 이상을 걷지 않으니 계속 보게 된다. 그들은 우리를 알아보고는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 코리안? 오늘도 사진 또 찍고 있니?"

오크나무들이 빽빽이 자라고 있는 1000m 남짓 되는 산길을 오르기 시작하여 오르락내리락한다. 몇 번의 고개를 넘나들며 힘들어서 6유로의 동키 서비스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숲길을 걸으니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과 오대산 선재길 생각이 났다. 나무들이 엄청 커서 사람이 작아질 만큼 숲들이 빽빽하다.

사려니 숲처럼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 듬성듬성 보이는 파란 하늘이 참 곱다.

어제 오후 내내 비를 머금은 나무들은 축축하여 힘든지 온통 검은빛이다. 견디어 내는 것이 힘든지 나무와 흙과 습기가 뒤범벅한 냄새가 진해서 차마 가까이 갈 수 없었다.

지금 서울은 일요일 오후 4시, 하늘이 참 좋다며 보내온 카톡 사진들과 스페인 레온 지방 오전 9시 하늘이 참 비슷했다.


''세계는 참 넓지만 이제 실시간으로 통합되어 좁아졌다!'

자갈로 만든 화살표

자전거 순례자들이 오르막에 열심히 페달을 밟아 앞서간다. 길을 비키라는 벨을 울리지 않는 매너와 경쾌한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오르막은 사람이 더 힘든데 자전거가 우선인 듯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보면 인상이 찌푸려지곤 한다.


한강 다리 걷기를 할 때도 인도에서 자전거는 끌고 가야 하는데 타고 가면서 벨을 크게 울리곤 한다. 사람이 우선이라고 친절하게 교육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뛰어가는 한국인 부부

오늘도 한국인들을 여럿을 만났다.

멀리서도 한국인임을 알아챈다. 젊은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한다.


서로 언제 왔는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언제 돌아가는지, 어디 사는지를 묻는다.

아가씨가 바람처럼 앞질러가며 인사를 한다. 발에 모터가 달린 것처럼 기계적으로 걷는다. 왜 이리 빨리 걷느냐고 물었더니


"오늘 새벽 5시 벨도라도에서 출발하여 블루고스까지 가야 해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하루에 50km를 걷는다고?"


나는 그제 벨로라도에서 출발하여 13km를 4시간 걷고, 빌라 블랑카 몬테스 데 오카에서 잤다. 오늘은 15km를 5시간 걷고 아헤스에서 자고, 내일 22km 6시간 걸어 부르고스에 가려고 하는데---


'이럴 수가. 내가 확실히 세월아 네월아 거북이인가 보다. 그래도 저건 아닌데!'


한강변 울트라 걷기 50km를 11시간에 걸었던 경험이 있다. 그런데 한강변 걷기는 평지이고, 산티아고 순례길은 걷기 차원이 다른데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저 사람은 자기 한계를 체험하는 순례 길인가 보다!'

푸드 트럭 사장님과

다시 약간의 평지로 접어드니 멀리 오아시스 같은 푸드 트럭이 보였다. 순례자들이 쉬어가도록 의자도 놓고 간단한 음료와 과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트럭 주인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망토를 두르고 리듬에 맞추어 가볍게 춤을 추고 있다.


가야 할 길이 남았지만 눈치 빠르게 우리가 한국사람인 줄 알고 한국말로 인사까지 하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1.5유로에 시원한 수박을 사 먹었다.

미국 동갑 친구들

며칠 전 나에게 목걸이를 선물해 주었던 미국인 동갑내기 자매를 또 만났다. 나는 걸고 있던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무척 기뻐하며 사진을 메일로 교환하기로 했다.


마지막 내리막길을 걸어 평지 숲 근처 성당 옆 휴게소를 만났다. 모든 순례자는 여기서 쉬어가며 즐겼다.

먹을거리는 많지 않았지만 맛있게 보이는 피자와 콜라로 이른 점심을 먹었다. 따뜻하고 바싹거리는 것이 참 맛있었다.

작은 새들과 고양이들이 순례자들의 잘못된 먹이 공세에 길들여져 손에 들고 있는 빵을 낚아채기도 한다.

아프리카 나미비아 사막의 여우들이 관광객 사이를 기웃거리며 재롱을 부리며 사람들이 주는 과자와 소시지를 맛있게 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서서히 길들여져 원래의 습성을 잃어가는 것이 어디 동물뿐이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나도 많은 것들 변한 것 같다. 적응하려고 애쓰며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 좋든 싫든.

어쩌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도


그런 것이 아닐까?

오늘의 숙소
모든 것은 아헤스로 안내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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