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 22,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22

아헤스에서 부르고스까지(22.6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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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게 같은 방에 혼자 오신 할아버지는 어제저녁 8시부터 안대 끼고 방의 전등을 모두 끄고 주무셨다. 우리 방 사람들은 핸드폰 불빛으로 살금살금 저녁시간을 지내다 9시에 자야 했다.


할아버지는(뭐 나도 친구들이 이미 할머니임) 일찍 주무셔서 그런지 새벽 4시부터 일어나셨다. 처음에는 바스락거리시더니 기어이 5시에 물건을 찾느라 전등을 커고 방안의 모든 사람들을 깨우셨다.

피곤하여 코를 골며 한참 자고 있던 10여 명이 넘는 순례자들은 모두 일찍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모두들 착한 사람이다. 새벽길 나서는 고집스러운 할아버지에게 싫은 내색 없이 엄지손가락을 보이며 부엔 카미노를 말해준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가능한 일인가!'


20240923%EF%BC%BF075950.jpg?type=w773 아타푸에르카 가는 평원 길


교훈을 주신(?) 할아버지 덕분에 평소보다 일찍 순례길을 나섰다. 아침 7시, 온 들판에는 안개가 뿌옇고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다. 큰길 자동차 불빛과 나란히 걷고 있는 순례자들은 주변을 돌아보며 어두운 산등성이 숨어 있을 해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산티아고 순례길 중 프랑스 길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만나는 규모가 크고 유명한 도시인 브루고스를 향하는 날이라 더욱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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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3%EF%BC%BF075804.jpg?type=w773 안갯 속 유적지 비석들


아헤스에서 30분 정도 걷다 보니 작은 마을이 보이고 비석들과 안내판이 심상치 않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오래된 최초의 인류 '호모 안테 세소르'가 약 100만 년 전부터 거주했던 아타푸에르카 고고 유적들이 이곳에서 발굴되어 200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 고고학 보호 지역이 되었다. 1977년에 이 종족을 '호모 안테 세소르'라는 신종 인류로 명명하였는데 네안데르탈인과 더불어 현생인류의 마지막 공동 조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안갯속에서도 대부분 순례자들은 길을 돌아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비석들을 만져보고 헤드 랜턴을 켜서 진지하게 설명글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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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벗어나 자갈산을 오른다. 목장의 동물들도 짙은 안개에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마음 바쁜 순례자들 발소리가 행진 소리 같다. 모두들 정말 부지런하다. 가끔 순례자들에게 뭉클할 때가 많아 다시 오고 싶을 때가 많다.


'이런 멋진 사람들 때문에 더 열심히 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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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많을 때면 간격을 두고 싶어 천천히 걷거나 멈추어 옆으로 빠져 쉬곤 한다. 뒤돌아보니 세상이 아득하고 안개가 몽실몽실한 것이 한 폭의 동양화 같다.


걸음을 멈추어 넋 놓고 풍경을 보고 있으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발길을 재촉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산 아래로 고개를 돌린다.

그제야 참 아름답고 멋지다며 사진을 찍었다.


'멈추면 달라지고 뒤돌아 보면 보이는데---'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20240923%EF%BC%BF085618.jpg?type=w773 언덕 정상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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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타푸에르카 산맥 1080m 정상에서 나무 십자자가 맞아준다. 이 높은 산을 넘어온 순례자들의 마음을 모으게 한다. 이 높은 산까지 십자가 매고 오느라 닳아진 신발 두 짝이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신발이 저렇게 닳아지도록
걸으면

뭐든
가벼워질 수 있을까?'


20240923%EF%BC%BF130844.jpg?type=w773 시내 입구 공원


멀리 한적한 공항과 공장, 주택들이 보이는 것이 부르고스에 다 온 것 같다.

아니다. 도시 입구에서 시가지 중심을 지나 대성당까지 4km가 남았다고 한다.


오늘도 그동안 계속 마주치던 미국 동갑내기 자매와 프랑스 여교사를 만났다. 우리는 이틀간 빌바오 미술관 투어와 시내 관광으로 순례길을 쉴 예정이다. 그들은 쉼 없이 순례길을 걷는다고 하여 정말 아쉬운 이별 인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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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친구 안녕!


보통 순례자들은 새벽부터 낮까지 걷고, 저녁이면 중심가에 있는 성당의 미사에 참석한 후 야경을 즐기고 다음 날 출발한다.

나는 브루고스에서 2박, 빌바오에서 1박을 하며 스페인 도시의 야경과 미술관과 공원, 상가를 둘러보며 여유를 즐길 예정이다.


브루고스는 옛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로 스페인에서 두 번째로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과 인류학 박물관 등 유명한 곳이 많다. 며칠 시골마을만 걷다 보니 맛있는 음식이 많고 색다른 스페인 도시가 그립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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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어느덧 부르고스 시내 초입 공원은 훌쩍 노란 가을이 되어 늦가을 같은 나를 맞아주었다. 뜨거운 여름 서울을 떠났는데 세월아 네월아 하는 사이 짙은 가을이 왔다.


몸이 단련되어 가는 것처럼

마음도 깊어지고

인생도 더 아름다웠으면---


하루 내 4만 보 걸어 아타푸에르카 산맥을 넘어 아름답고 성스러운 도시 부르고스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며 연못의 오리들도 내 곁으로 모여들고 분수의 힘찬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20240923%EF%BC%BF172400.jpg?type=w773 브루고스 대성당

브루고스는 9세기말 아스투리스 왕국에 의해 해발 800m 언덕 요새에 도시가 세워졌다고 한다. 11세기 무어인을 물리친 스페인의 자랑인 영웅 시드 캄페아도르(엘시드)의 출생지로 대성당 안에 그의 무덤이 있을 정도이다. 부르고스 대성당은 레온 대성당과 함께 스페인을 대표하는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굉장히 크고 화려하다.

대성당은 입장하는 순례자들에게 50% 할인을 해주는데 사람들이 아주 많다. 성당 내부의 장엄함과 황홀감은 가던 길을 멈추게 하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구시가지에는 여러 개의 성당과 유명한 유적지들이 많고 멋이 있어서 그저 부럽고 놀라울 뿐이었다.


'아!, 대단하다. 스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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