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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길 20,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20.

벨로라도에서 빌라 블랑카 몬데스까지(11.9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벨도라도 성당 앞 벽화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의 마을 벨로라도에 도착할 무렵 실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더 오기 전에, 어둡기 전에 숙소를 정해야 한다는 마음이 급해져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작은 골목을 벗어나자 작은 공터와 성당이 있고 주차장 앞 커다란 벽화를 보고 놀랐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상징하는 그림이 있었고, 바로 벨로라도 작은 호텔의 주차장 벽화였던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인생의 길을 찾는 사람들이 걷는 곳. 길을 찾는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벽화가 선물 같은 벨로라도!'

기죽 공예 모습의 벽화


산티아고 대성당 가는 순례길 지도 벽화


옛날부터 가죽 공예로 유명하여 상점마다 작은 가죽 수공예 물건을 판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을 것 같은 오밀조밀하게 셍긴 물건들이 많았다. 사고 싶은 물건들이 많았다.

하지만 산티아고까지 걸으려면 배낭의 무게를 줄여야 한다. 한참을 망설이다 예쁜 가죽으로 만든 안경줄을 1.95유로에 샀다.

'벨로라도 의 추억!'


작은 골목마다 오래되어 허물어질 것 같은 집들과 벽들에 그림들과 문향들이 그려져 있다. 길바닥에도 손과 발의 부조가 많이 박혀 있다.

건물의 창문 등을 활용한 노부부의 생활모습과 알폰소 7세가 무어인들을 정복하고 스페인의 영토를 탈환하고 돌아오는 그림도 있다.

산티아고까지 지도를 멀그머니 바라보는 늙은 사제의 순례길 모습이 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숙소 1층 레스토랑이 제법 맛집인지 낮 시간에도 현지인들의 식사 모임으로 시끌벅적하다.

저녁 6시 식사를 하러 갔다. 순례자 정식이 14유로라고 한다. 지금까지 거처 온 스페인 숙소 근처 식당에는 순례자 정식이 있고 14~15유로로 가격이 비슷하다.


전식, 주식, 후식 세 가지를 주는데 몇 가지 중 선택 주문을 하고 빵과 와인은 필수이다.

이 집은 다른 곳과 달리 선택의 범위가 넓어서 좋았다. 야채샐러드와 비프스테이크가 있다니 눈을 번쩍 떴다.


야채를 곁들인 비프스테이크


주문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 아가씨가 혼자 들어와 좌석을 둘러본다. 나도 혼자이니 같이 먹자며 같은 테이블 겸상을 했다.


이 식당은 저녁식사에는 순례자 정식이나 코스 정식만 주문받는다고 한다. 아가씨는 머뭇거리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며 3.5유로 감자튀김 하나만 주문해도 되냐며 확인했다. 아마 돈을 아끼느라 그런 것 같았다.

종업원이 내 눈치를 보며 같은 테이블에서 먹으면 괜찮다고 말해 나도 좋다고 말했다.


내 몫의 와인 한 병과 식사를 나누어 먹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26세에 회사를 퇴직하고 준비 없이 산티아고에 왔는데 여러 가지 생각이 많았다.


부모님과의 소통, 직장에서의 불협화음, 자립해야 할 불안한 미래 등등 ---

파리까지 중국 항공 경유로 오는 것만 70만 원에 비행기표를 사고 귀국은 아직 미정이라 했다.


"빨리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고 유럽여행을 하고 싶어요. 그냥 걸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많이 힘드네요"


그녀에게 왜 부모님 몰래 이곳에 왔는지, 완주보다 천천히 길을 걸으며 뒤를 돌아보고, 사람들을 잘 보라고 했다.


그리고 성당 앞 거리의 상징 벽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저 그림은 인생이고,

저 사람이 자네이고, 나 일수 있어.

어두운 새벽 별을 빛 삼아

스스로 인생의 길을 찾아가는 거"


인생에 몇 번의 고비가 있는데 지금이 그때인가 보다고 말하자 그녀의 선한 눈에 이슬이 맺혔다.

식사값을 대신 계산하고 나와서 식당 앞에 버티고 있는 벽화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녀는 오늘 이 골목을 여러 번 걸었는데 저렇게 큰 벽화가 있는 줄 몰랐다며 여러 가지 고맙다고 했다.


'왜 고맙다고 하는 걸까?'


벽화는 오늘 비 오는 낮과 어두운 저녁에, 혼자 볼 때와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분명히 달라 보였다.

배웅하는 벽화
벨로라도의 마지막 벽화


오늘 아침 벨로라도를 떠나는 순례자들을 위해 마을 끝에 있는 마지막 벽화가 '부엔 카미노'하며 배웅하였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저 멀리 그녀가 보였다.


"어서 와, 벨로라도에는 벽화가 많아. 마지막 벽화 앞에서 사진 찍어줄게?"


"고맙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혼자 와서 제 사진을 찍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에요"


"활짝 웃어봐. 그래 정말 예쁘다."


나도 길을 찾고 있다!

어젯밤 식당의 빨간 조명 아래 어두운 아가씨가 아니라,

이제는 산티아고 길에서 만난 환하게 웃는 젊은이로 내게 남아있게 되어 정말 좋았다.


벨로라도는 벽화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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