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경쾌한 도시 빌바오에서 1박 2일을 지내고 다시 브루고스로 왔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리더니 브루고스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엊그제 처음 왔을 때의 맑은 하늘 중후한 도시가 아니라 회색빛 묵은 도시에 차가운 감정의 브루고스를 마주했다.
'같은 장소가 이렇게 다른 느낌이 들 수 있을까?
'날씨 때문일까?'
'아니면 빌바오와 비교가 돼서 그런 걸까?'
브루고스 대성당의 야경
성당 건물만의 역사성과 예술성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브루고스 산타마리아 대성당을 다시 보았다.
화려함은 대단하지만 깊은 아름다움은 덜 한 것 같다. 건축은 잘 모르지만 1221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65년 완공까지 수백 년 보수공사를 하며 비실리카양식, 르네상스, 바로크, 고딕 양식까지 모든 건축형태를 갖추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뭐든 욕심이 과하면 과부하가 생기는 것 아닐까?'
순례자 여권 도장
순례자 여권을 제시하면 입장권을 할인해 주고 출구 앞에서 세요(순례길 도장)를 찍어준다.
화려한 제단과 천정
화려한 제단의 다채로운 형상들, 천국으로 가는 계단, 천장과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조각들의 정교함과 성화들의 화려함은 신자가 아님에도 많은 놀라움이 된다. 곳곳에 스테인드글라스 성화에 햇빛이 비칠 때면 그 아름다움에 걸음을 멈추게 된다. 스페인의 영웅 엘 시드와 그의 아내의 무덤이 대성당 안에 있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이다.
스테인드글라스
스페인의 신대륙 발견 후 대단한 권세는 성당의 위용과 같았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나는 솔직히 예나 지금이나 종교시설이나 종교인들의 화려함이 불편하다.
순례자 조각
대성당 앞 산 페르난도 광장에는 나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순례자 조각상이 있는데 브루고스를 대표하는 상징이라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비는 곳이다.
다양한 모습들의 솔직한 사람들을 지켜보는 것이 저 화려하고 대단한 성당을 보는 것보다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
브루고스 전망대
대성당 언덕 위에 있는 전망대에 올라가 브루고스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에 굉장히 규모가 큰 성당을 중심으로 종교 건물들이 제일 많이 보인다. 저 수 없이 많은 건물들이 평범한 사람들의 기쁨이고 평화가 되었기를 믿고 싶다.
대성당은 하루에도 햇빛의 움직임에 따라, 날씨에 따라 달리 보인다고 하더니 첫날과 확연히 달라 보였다. 하얀 대리석에 눈부신 조명은 대성당을 더 창백하게 보이게 했다.
비가 오고 바람까지 불어 쌀쌀한 브루고스 마지막 날이다. 얼큰한 김치찌개에 따뜻한 밥이 먹고 싶어졌다. 숙소 근처에 '소풍'이라는 한식당이 평이 아주 좋아 찾아갔다.
장소는 넓지 않은데 식탁마다 예쁜 자수가 새겨진 상보가 덮여 있고 색동 앞치마가 걸려 있어 정말 반가웠다.
식당 안은 파리 한식당처럼 의외로 외국인들만 식사 중이었다. 김치찌개와 비빔밥을 주문했는데 한국에서 먹던 것과 똑같은 모양과 재료, 맛이었다. 아니 한국보다 더 정갈하고 맛있었다.
파리 한식당은 푸젼이라 조금 아쉬웠는데 브루고스 한식당 '소풍'은 비빔밥에 한국에서도 잘 안주는 귀한 도라지나물까지 있어 신기할 정도였다.
사장 겸 주방장은 중년의 여자분인데 프랑스에서 살다 이곳 브루고스에서 제2의 인생을 소풍처럼 살고 싶어 식당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나도 그런 마음에서 블로그 닉네임이 지구 소풍이라며 핸드폰을 보여 주었다.
조금 있으니 팜플로니아에서 만나 이틀을 함께 걸었던 명랑하고 예의 바른 젊은이 커플이 식당에 들어왔다.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고 정말 반가워했다.
이틀 동안 서로의 이야기를 하며 가까워지고 도움을 많이 주었고 우리는 블로그 이웃을 맺었다. 나는 하루 15-20km, 그들은 하루 10-15km를 걷는다고 했다. 나보다 더 천천히 거북이처럼 걷는다던 젊은이들을 이곳에서 보름 만에 다시 만난 것이다. 놀랍고 정말 운이 좋은 날이다.
그들은 걸음 속도가 느려 나와 걷는 거리가 많이 차이 나서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다. 거북이처럼 꾸준히 걷는 동안 나는 토끼처럼 로그로뇨에서 2박, 브루고스와 빌바오에서 3박을 쉬고 놀았으니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것과 같다.
아, 세상은 공평하다.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다는 동화는 진실이고 교훈이다!'
집 떠난 지 23일 동안 세월아 네월아 쉬며 걸어 프랑스 길 1/3밖에 못 왔지만 순례길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