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길 25,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25.

브루고스에서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까지(20.5km)

by 지구 소풍 이정희
비바람 부는 브르고스 대성당

어제 부르고스 도착 후부터 내리던 비는 오늘 아침 거친 바람까지 동반했다. 하얀 대리석의 거대한 대성당도 세찬 비바람에 뿌옇게 되어 존재감을 덜했다.


'뭐든 날려 버릴 것 같은 부르고스의 비바람은 매서워---'

순례자 조형물

종교의 도시 브루고스는 악천 후에도 먼 길 떠나는 순례자들을 예의 있게 배웅하였다. 시내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여러 가지 의미의 순례자 조각들로 길을 안내하고 멀고 힘든 길의 의미를 남게 했다.

새로 단장한 브루고스 대학 담장에 두 개의 눈금 표시가 눈에 띄게 표시되어 있었다. 두 번의 대홍수에 도시가 잠겼던 사건을 잊지 않으려고 기록한 것이다.


또다시 실수하지 않으려는 브루고스 사람들의 현명한 용기이다.


우리의 잘못된 역사도, 개인의 실패 이야기도 감추려 하기보다는 정확하게 기록하고 파악해야 같은 실수를 안 한다고 생각한다.


'잊지 않으려는 각오와 기록하려는 용기'


매일 글쓰기도 이런 이유가 제일 크다. 성실하게 사실을 정확히 기록해야 성찰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적 드문 국립 교도소를 지나 해바라기 밭과 고속도로 다리 밑을 지난다. 바람이 어찌나 세었는지 설익은 나뭇잎들과 부러진 나뭇가지들이 즐비하다.


자동차도 무서워서 안 다닐 것 같은 큰길에 알록달록 순례자들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우비도 없이 비를 홀딱 맞는 사람, 반바지에 반팔이 추워 얼굴이 시퍼런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절룩거리며 멈추기를 여러 번 하는 사람들도 있다.


세 시간 반째 점점 비바람이 거칠어지는데 피하거나 쉴 곳이 없다. 피하지 못하면 즐기라고 아예 발걸음을 서두른다.

천천히 걷던 사람들은 멈추어 비켜주며 웃는 얼굴로 "비엔 카미노", "올라"를 말한다.


'이 사람들은 왜 이런 고생길을 웃으며 걷고 있는 걸까?'


'나는 왜?'

맛없는 카페의 벽

어느덧 작은 마을을 들어서자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확 끌어당긴다. 처음으로 문을 연 아담한 가게를 찾았다. 가방 안에 빵과 뜨거운 물이 있지만 도저히 지나칠 수 없었다.


스페인 와서 제일 맛없는 빵과 커피를 4유로에 먹었지만 오랜만에 앉아서 젖은 발을 쉴 수 있어 감사했다. 음식점에 순례자들의 흔적이 가득하다. 극성스러운 한국이들의 즐거움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순례자들은 별거 아닌 것에 잘 웃고 함께 한다.

순례자들을 위한 메시지 벽화

가도 가도 마을은 안 보이고 가끔 보이는 밀 보관창고와 높게 쌓아놓은 짚더미와 자갈들뿐이다. 허름한 창고마다 재미있는 벽화가 많았다.


지루한 평원을 지나는 지친 순례자들을 위해 서툴지만 정성껏 그려 놓은 것이다. 덕분에 거친 바람에 흔들리던 몸과 마음이 여유를 찾았다.


뭐든 정성스러운 것들은 의미가 특별하다. 물건이든, 일이든, 사람이든 진심이 읽히면 감동이 우러난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그렇다!

마을이 아닌 지나가는 길옆에 아주 작고 성당이 보였다. 문이 활짝 열려있고 밝은 실내가 따뜻하게 느껴진다. 우비를 입은 채 가볍게 구경하러 들어갔다가 깜짝 놀랐다.

비에 젖은 순례자들에게 조개 목걸이를 달아주시며 기도해 주시는 수녀님

깔끔한 성당에 성가가 은은하게 울리고 체구가 작고 나이가 많은 노인이 환하게 순례자들을 맞이해 주셨다. 찾아보니 수녀님이시란다.

우비를 입은 채 무릎을 꿇고 진중하게 기도하는 순례자들이 여럿이다. 한글 안내 주보가 있고 세요를 찍어주시며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며 물어보신다.


그리고 산티아고 조개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시며 이마에 손을 대며 기도를 천천히 해주신다.


'아, 이거 무슨 기분이지!'


비바람을 원망을 가라앉히고 퉁퉁 불은 발을 다독이며 뭉클하게 한다. 한참을 앉아 성당을 둘러보고 수녀님을 살펴보았다.


어제 본 엄청 크고 화려하고 감시 카메라와 경비원이 있던 대성당과 비교가 되었다.

종교에 삐딱하던 내가 선해지는 것 같다. 구석에 있는 작은 선물함 같은 헌금 통을 찾아내고 지갑 안의 지폐와 동전을 모두 넣었다. 헌금은 순례 중 다친 사람들을 위해 사용한다고 쓰여있었다.

따뜻하게 맞아준 작은 성당,

진심이 느껴지는

수녀님의 작은 손과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해가 비치어도 바람은 점점 강해졌다. 주변에는 온통 자갈과 마른풀들과 풍력 발전기뿐이다.


진흙 오르막길을 몇 번 오르니 산등성이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오르니요스 델 카미노'가 내려다보인다. 울릉도 나리분지 마을처럼 포근하다.

마을 입구 안내 간판

끝이 보이지 않는 길 너머에는 지친 순례자들을 기다리는 아늑한 알베르게 마을이 오아시스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 469km 남았다는 표지가 미소 지으며 환영해 주었다.


세월아 네월아

걷고 걸어

무려 308km를 왔다.


그리고

비바람이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비바람 부는 브루고스를 떠나며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가을길 24, 세월아 네월아 산티아고 순례길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