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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두팔 Mar 01. 2023

집으로 가는 길

엷여덟 살의 떠돌이

까마득한 나이, 만 18세에 나는 집을 떠났습니다.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게 되면서, 태어나고 자란 지방 소도시를 떠나 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집안 형편이 몹시도 어려운 때였습니다. 부모님께서 새로 차린 가게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고, 나는 서울에 있는 사립대학에 합격을 했고, 동생은 현악기 전공으로 예술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은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공부를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등록금이 반정도밖에 안 되는 국립대로 진학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확실한 합격을 위해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안정 지향적인 삶을 이어오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열여덟의 나는 철없이 합격을 기뻐하며, 집을 떠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생각도 해보지 않은 채 그렇게 서울로 와 버렸습니다. 물론 합격 후 입학을 기다리는 동안 고향에서 보낸 시간들이 마냥 즐겁고 신나지만은 않았습니다. 합격한 다른 친구들이 옷을 사고 구두를 사러 다니는 동안 나는 소위 '명문대'에 입학을 해 놓고도 집안 형편 때문에 종종 우울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도 나는 철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 때나 지금이나 철이 없긴 매한가지입니다. 아무튼 머릿속이 백지인 채로 부모님 곁을 떠나 서울로 왔습니다. 서울행 기차를 타던 그 순간이 부모님과의 영원한 이별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머릿속이 백지 같고 철이 없던 나는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지나고 돌아보니 해보지 않아서 후회되는 일들이 많지만 그래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열심히 공부했고, 눈물 꽤나 떨구게 된 첫사랑과도 만나고 이별했고, 회사를 열심히 다녔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크고 작은 실수가 이어지는 삶이었지만 넘어질 때마다 가족의 사랑 덕분에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세월이 이렇게나 많이도 흘러 있습니다. 거의 매일 '언제 이렇게 나이 먹었지?'라는 생각을 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어제는 화요일, 가게를 쉬는 날이었습니다. 첫 출근을 앞둔 아들아이와 함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고향집에 인사를 다녀왔습니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 등록금과 생활비를 걱정을 하며 고향을 떠났던 열여덟 살 소녀는 그때의 그 철없는 소녀보다 대여섯 살이나 많은 아들을 데리고 고향에 가게 되었습니다. 학비와 생활비 걱정 대신 '하차감'이 좋다는 차를 운전해서 말이죠. 촌 놈이 정말 출세했습니다. 모든 것이 막막했던 날에서 시작한 새로운 삶은 이제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새로운 사회 구성원을 세상에 내놓으며 함께 미래를 계획하고 가꿔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보면 이 모든 것이 부모님의 끝없는 희생 위에서 이뤄질 수 있었습니다.


쇠락해 가는 지방 소도시에서 온 생을 살고 계신 나의 부모님은 이제 연세가 많으십니다. 언제까지나 나보다 힘이 세고, 삶의 전반에 대한 지혜로 나를 이끌어주시며, 든든한 기댈 언덕이 되어주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어느 순간 정신 차려보니 부모님과 나의 포지션은 맞교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적과도 같은 만남으로 부모 자식의 연을 맺은 우리는 일생을 서로의 보호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엔 부모님께서 나의 보호자로, 다음에는 내가 두 분의 보호자로. 생후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던 내 아이를 10년이나 사랑으로 길러주신 부모님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어릴 적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연못가를 산책했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제 아이에게 드문드문 삶의 깊이가 담긴 조언을 건네는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봄이 오는 연못가를 걸었습니다.


나이 많은 부모님과 나이 많은 강아지 두 마리가 살고 있는 낡은 고향집을 떠날 시간, 다시 떠돌이가 될 시간이 되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 집 근처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래전, 아주 오래전, 삶이 엄마를 속일 때 나와 동생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우리를 안고, 곁에 앉히고 사진을 찍었던 곳. 아직 20대의 엄마가 우리를 데리고 다녀갔던 곳.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서둘러 다시 운전을 했습니다. 곁에 앉은 아들에게 듬성듬성 살아온 이야기를 하다가 그만 울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 나는 영원히 집 떠나던 시절의 열여덟 살로 남아 있는 것만 같은데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러버렸는지 모르겠다고. 부모님께서 내게 해주신 10분의 1도 너에게 되갚지 못해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40여 년 전의 사진 속으로 돌아가보았습니다.

부모님 앞에 나이 드는 것이 죄스럽습니다. 삶이 사정없이 채찍을 후려칠 때도 우리를 버리지 않았던 강인한 어머니와 매일 아침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학교까지 차를 태워주시던 사랑 깊은 아버지. 나는 영원히 열여덟 살의 딸로 머물러야 하는데, 그때의 부모님보다 더 나이가 많아지고 흰머리칼이 늘어나고 간혹 삶에 지친 모습을 보여드리게 되는 것이 죄를 짓는 일로 여겨집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눈물을 떨구며 전하는 나와 부모님 이야기를 아들은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더 많이 사랑하자, 엄마 아빠보다 더 잘 살아야 한다, 네가 있어 행복하다 독백 같은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에 있습니다. 아들아이의 첫 출근을 앞두고 가족은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세월을 넘나들며 사랑은 깊어집니다. 삶의 중요한 전환점에 설 때마다 굳센 언덕이 되어주는 가족.


긴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는 나는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서 있습니다. 열여덟 살의 딸로 부모님 곁을 맴돌며, 젊은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어머니, 사랑하는 내 동생,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참 눈이 작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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