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없는 추풍령 외가를 추억하며
무궁화호 창 밖으로 ‘추풍령역’이 빠르게 지나간다. 자세를 곧추세우고 창 밖 풍경에 초점을 맞춘다. 놓치지 않으려 애써보지만 소용없다. 외가가 있던 집터는 이제 찾을 수 없다.
철도 부지에 속해 있던, 도로변 우묵했던 오래된 터. 동네에서는 ‘외딴집’으로 불렸었고, 어린 내게는 ‘마당 깊은 집’이었던 외가. 철로변 크게 휘어지는 신작로에서 몇 발짝 떨어져 주저앉은 집터였다. 빛바랜 초록색 양철 삽짝문을 열면 마당이 나온다. 한때 소나 돼지가 살았던 외양간이 마당 끝에서 낡아가고 있다. 짐칸과 바큇살이 녹슨 자전거도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그 앞으로 큼지막한 두엄자리가 보인다. ‘통시’라고 불렸던 푸세식 화장실이 외양간 왼편에 붙어 있다. 그리고 그리운 감나무 세 그루.
늙은 나무는 신통하게도 매년 붉은 감을 주렁주렁 매달았다. 늦가을, 외할아버지는 끄트머리에 천주머니가 달린 장대로 솜씨 좋게 감을 따 내린다. 외할머니는 그렇게 한알씩 조심스레 땅으로 내려온 홍시를 모아 불을 때지 않는 건넌방에 신문지를 깔고 가지런히 앉혀 놓는다. 지금보다 길었던 겨울밤, 냉골 같은 건넌방에서 얼어가던 홍시는 그 시절의 잼 Jam이다. 반은 얼어있는 홍시를 하나 으깨어 따끈하게 데운 인절미에 찍어 먹던 외가의 겨울밤. 밤은 길고 즐길거리라고는 늘 지지직거리는 텔레비전과 역시 지지직거리는 낡은 라디오 한대가 전부였던 시절. 내복만 입은 나는 두 분의 오락거리가 되어드리곤 했다. 겅중겅중 정체불명의 학다리 춤을 추며 두 분을 웃게 해 드리던 날들이 있었다.
마당에는 담을 등지고 할머니의 작은 정원이자 텃밭이 있다. 맨드라미가 피고, 꽃 위에 앉은 사마귀가 당랑권 연습을 하고, 보라색 가지가 자라고, 담벼락 근처에선 옥수수가 무럭무럭 자랐다. 빨랫줄을 괴어 놓은 장대 끝에 고추잠자리가 자주 내려앉는다. 살며시 따서 꿀을 빨아먹곤 했던 샐비어가 붉게 붉게 피던 계절도 있었다. 정원을 벗어난 마당 한구석에는 알록달록 채송화가 피는가 하면 ‘정지’라고 불리던 부엌문 근처에는 봉숭아가 자랐다. 봉숭아는 우리들의 여름 손톱을 발갛게 물들여주는 천연 매니큐어다.
아직 흙바닥에 나뭇가지를 넣어 군불을 때던 오래된 부엌을 지나면 작은 뒤뜰이 나온다. 사시사철 축축했던 뒤뜰에는 모란이 자랐다. 뒤꼍은 어쩐지 사계절 으스스해서 어지간해서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사촌들과 숨바꼭질을 할 때도 뒤꼍에는 숨지 않았다. 부엌 옆 오솔길에는 한약방 냄새가 나곤 했던 작약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낮은 작약을 지나면 키 큰 호두나무. 푸른 호두열매가 다 익으면 할머니는 손가락을 검게 물들이며 알맹이를 꺼내서 말려서 딱딱한 껍질을 부수고 속알맹이를 꺼내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맡으셨다. 일상의 번거로움은 모두 할머니 몫이었다. 그렇게 검은 물든 할머니의 손가락과 손바닥은 한동안 제 색깔로 돌아오지 않았다. 쉬 빠지지 않는 독하고 질긴 호두물. 크고 두껍고 거칠었던 할머니의 손바닥. 나면서부터 그런 일만 실컷 하라고 태어난 것도 아니었을 텐데 할머니는 그렇게 살다 가셨다.
젊은 시절 식당을 하던 고단한 엄마. 늘 식당 일에 지친 엄마의 수고를 덜어줄 겸, 어린 동생과 나의 방학은 추풍령 외가에서 지내는 피접 기간이었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추풍령 고개. 여름방학의 기억은 마당에서 쑥쑥 자라는 옥수수와 자고 나면 사라지곤 했던 앞산. 자욱한 새벽안개 뒤로 몸을 숨기던 외가 앞산은 채석꾼들의 마구잡이 돌 캐기로 지금은 흉하다. 멀리 차창 밖으로 허리가 꺾인 안쓰러운 모습을 잠깐씩 내보인다. 많은 것이 변했고, 변하고 있고, 변할 것이다. 영동에 있는 대서소-지금으로 치자면 법무사 사무실-에 다니던 외할아버지는 괴테와 같은 분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집을 나서고 또 정확한 시간에 삽짝을 열고 들어오신다. 찜통 같은 여름, 시외버스에서 내린 할아버지는 퇴근과 동시에 펌프가 놓여있던 또 다른 뒤뜰로 가서 찬물을 길어 샤워를 하신다. 깔끔한 성격에 항상 손에서 빗자루를 놓지 않고 ‘소지’를 하던 어른. 간단한 세수나 손발 씻기는 앞마당에 있는 수돗가를 썼다. 온몸을 씻어야 할 때는 뒷마당 빨랫줄에 얇은 이불을 쳐서 샤워커튼으로 삼고 찬물 샤워를 했다. 겨울에는 동네 목욕탕을 갔다. 그런 시절, 그런 생활환경에 우리는 모두 적응하며 잘도 살았다. 지금 같으면 불편해서 도저히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 집에서. 오밀조밀 행복하게. 안채의 뒤뜰인 뒤꼍과 별도로 외가에는 뒷마당이 있었다. 기역자로 꺾인 집구조의 꺾인 부분. 뒷마당에는 뒷방도 있었다. 뒷방에는 간혹 막내 외삼촌이 와서 지냈다. 비쩍 말라 키가 크고 안경을 쓰고 말수가 적었던 외삼촌. 그래도 다정해서 갱지에 드레스 입은 흑백의 공주님 실루엣을 그려서 가위로 잘라 종이인형을 만들어주곤 했었다.
겨울의 외가는 할머니가 만들어주시는 만둣국이다. 밀가루를 반죽해 만두피를 밀고, 두부와 돼지고기와 묵은지와 삶은 당면을 총총 썰어서 속을 준비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만두를 빚는다. 할머니와 나와 내 동생과 외가 근처에 사는 이종사촌 남자아이 둘. 이렇게 다섯이서 어두컴컴한 방에 모여 앉아 각자의 만두를 만든다. 손바닥만 한 만두, 속이 미어터지는 만두, 반듯하게 잘생긴 만두, 못생기디 못생긴 만두, 이미 한 귀퉁이가 벌어진 만두. 할머니는 한 쟁반 빚어진 만두를 정지로 내어가 금세 뜨거운 만둣국을 만들어 오신다. 우리는 경쟁한다. 누가 더 많은 만두를 먹냐를 두고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우승자는 늘 정해져 있다. 당연하게도 그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이종사촌 오빠. 외할아버지는 이 오빠가 눈에 띄기만 해도 냅다 소리를 지르거나 빗자루 몽둥이를 거꾸로 쥐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휘두르셨다. 반면 나에 대해서는 애지중지 귀하게만 여기셨다. 때로 사랑과 미움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나 보다.
색색의 꽃이 피고, 담벼락 아래를 흐르는 개울물에 송사리가 헤엄치는, 풀밭에선 아기 청개구리가 뛰어오르는 추풍령의 여름. 인절미에 찍어 먹는 살얼음 낀 홍시 터지는 소리와 만둣국에서 피어오르던 뜨거운 김이 얼굴에 와닿는 외가의 겨울. 내 유년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던 외가의 두 계절은 이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1913년에 태어나 말년에는 치매를 앓다 돌아가신 외할아버지의 부고에 짐승처럼 울었다. 멈추지 않는 울음에 이모들이 다 달려와 만류할 정도로 나는 울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외할머니도 세상을 뜨셨다. 외할머니는 1912년에 태어나 거의 한 세기를 신산하게 살다 가셨다. 사랑하는 막내딸의 사랑하는 딸들이었던 나와 동생을 자주 돌봐주시고, 많은 연세에도 운동회다, 어린이날이다, 엄마의 자리를 대신해 주셨던 외할머니. 다행히 나의 결혼식과 내가 낳은 아이를 보고 난 후 떠나셨다. 모든 이별은 서글프다.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울음 대신 열심히 일을 도왔다. 쟁반을 나르고 테이블을 치우고 신발을 정리했다. 그렇게 나는 어른이 되었다.
외가가 있던 자리는 두 분이 떠나시고 한동안은 다른 이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리고 그 후 결국 유독물질 석면이 들어있다는 슬레이트 지붕이 나랏법에 따라 철거되고 안채와 뒤뜰과 마당과 외양간, 몇 그루의 나무들도 모두 철거되었다. 땅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은 산산조각 나서 어디론가 실려가고, 부지는 본래 주인이었던 철도공사로 귀속되었다. 몇 해 전 나는 미리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외가가 있는 도로를 지나갔다. 차를 잠시 세우고 대문 사진을 찍었다. 집이 철거되기 전의 일이다. 낡은 양철 삽짝과 더 낡은 흙담. 나의 유년과 나의 그리움, 모든 것은 다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서글픈 믿음을 사진첩에 담았다.
외딴집, 마당 깊은 집, 추풍령 외가는 이제 없다. 그 집에 오래오래 살던 두 분처럼 이제는 나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언젠가 나도 없게 될 거라 생각하면 더 이상 슬프지는 않다. 자그마한 손톱이 자라며 봉숭아물이 조금씩 사라져 가듯이 우리는 자라고, 우리는 사라진다. 기억만을 남긴 채. 그리고 기억하는 그 사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