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al Heritages that lie in Gyeongju
모든 사진은 2019년 6월 경주여행 중에,
Contax G2, Contax T2와 다양한 필름으로 촬영하였습니다.
색감 및 조도가 일정치 않은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법 오랜만에 방문한 경주였다. 역사를 전공한 대학생 시절에 유독 문화재에 관심이 많았다. 전공을 한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도 없진 않았겠지만, 문화재를 마주할 때의 느낌이나 그 문화재가 오랜 시간을 견뎌오며 갖고 있는 이야기 등을 알아가는 게 좋았다.
그런 이유로 학생 때는 여러차례 경주를 다녀왔다.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국보급 문화재가 밀집된 곳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발길 닿는 곳마다 관심가는 곳 천지였던 도시였으니. 그러나 졸업 직후 군대, 해외생활, 직장 생활 등으로 전공과는 무관하게 바쁜 삶이 이어져 자연스레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나 관심이 다소 줄어 한동안 잊고 지낸 삶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경주가 그리웠다. 충분히 동남아의 다른 여행지를 갈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 경주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번 나홀로 경주여행의 목적은 대부분 문화재에 맞춰져 있었지만, 수많은 문화재들 중 선택을 위해 내가 몇 가지 설정한 조건은 첫째로 자연과 잘 어우러져있고, 둘째로 사진이 예쁘게 나올 것 같은 곳이었다. 가본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지만, 가본 곳이라고 해도 어차피 몇 번이고 다시 가도 좋은 게 문화재일 뿐더러, 시간도 오래되어 다시 가더라도 너무 반가울 것 같은 곳들 투성이었다.
밤늦게 경주에 도착해서 옥산서원 인근의 숙소에서 잠을 청한 후 아침 느지막이 길을 나섰다. 실은 햇빛이 좋은 새벽이었다면, 5시에도 일어나서 숙소를 나설 의향도 있었지만 날이 너무 우중충해 10시 넘어까지 실컷 잤다. 첫 목적지는 안강읍에 위치한 독락당이었다. 여행지 선택 기준 1, 2번에 모두 부합할 것 같은 곳이었고, 기대는 틀리지 않았다.
이름부터 멋드러진 곳이다. 홀로 있어도 즐거운 집이라니. 회재 이언적 선생이 관직을 박탈당하고 내려와 살기 위해 지은 곳이라고 한다. 오래된 세월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지만, 건축 구조도 독특할 뿐더러 자연과의 조화를 어찌나 이렇게 완벽하게 구현해내었는지, 이미 방문하기 전부터 기대를 한껏 품고 갔던 곳이었다.
독락당의 대문을 지나도 좋고, 옆길로 스윽 빠져 지나가도 좋다. 독락당의 별채, 계정으로 가는 길이다. 어딘지 모르게 틀에 박힌 방식에서 조금은 벗어나 있다는 느낌.
그리고 이렇게 독락당 뒤를 흐르는 자개천을 마주하는 별채인 계정을 맞이하게 된다. 조선시대 당시 유행했던 도교의 멋이 한껏 투영된 건축의 아름다움. 저 마루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순간만큼은 삶이 어떠했건 간에 여유롭고 즐거웠으리라.
참 혼자 좀 조용하게 물가에 앉아 쉬다 오고 싶은 곳이었는데, 야유회마냥 돗자리깔고 막걸리를 드시는 중년의 아저씨, 아주머니들. 거의 15명이 넘는 분들께서 워낙 시끌벅적하게 놀고 계셨다. 이곳의 정취가 술맛을 더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달갑지 않았던 경험.
못내 아쉬움을 남기고, 차로 1분여 떨어진 곳에 산자락에 위치한 또 다른 문화재를 찾아 이동했다.
실은 문화재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석탑은 석가탑, 다보탑 같은 게 유명하다는 사실 외엔 별 의미가 없겠지만, 실은 종교적 측면으로는 숭배의 대상으로, 미술사와 건축사적 측면에서는 예술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했다고 하면 가장 많이 들었던 게 "와, 생긴거랑 잘 어울리시네요(따분하게 생겼다는 말인듯)"와 "무슨 공부했어요?" 따위의 말이었다. 첫번째는 그렇다치고, 두번째 물음에는 항상 아무도 관심 갖지 않겠지만 나홀로 불교문화재에 관심이 많아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중에서 가장 관심이 많았던 게 석조문화재(석탑, 부도, 석등, 불상 등)였다.
그렇게 된 건 교수님의 영향이 컸다. 중년부터 백발이 되었고 술과 담배를 즐기시며 발굴장과 집무실을 오가며 연구를 이어가시는 쌍남자 스타일인데, 정말 반전스럽게도 마르지 않는 샘 같은 언변의 소유자였던 교수님의 이야기 보따리 덕택에 교수님께서 전공하신 분야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해야하나. 대학 4년동안 불교문화재만큼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었노라 지금도 생각한다.
석탑은 본디 목조건축을 돌로 형상화(번안)한 것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목조탑(목조건축)이 불과 벌레, 습도 등에 약하다보니, 우리나라에 널리 있는 화강암을 이용하여 정제된 기술을 활용해 종교적 건축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고 이해하면 된다. 그렇기에 보통 석탑에도 기반(기단)이 있고, 벽면을 이루는 몸체(탑신)이 있고, 지붕(옥개석)이 있고, 그를 떠받치는 기둥(우주, 탱주)가 있다. 시기에 따라, 지역에 따라 변형, 발전되어 통일신라 시기에 8세기경 정형으로 자리잡은 것이 흔히 석가탑으로 불리는 불국사 삼층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정혜사지 13층석탑은 정형에서 완전히 벗어난 탑이다. 정형과 다르다는 의미로 이형석탑이라고도 부른다. 석조건축도 일반적인 목조건축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할 때, 기단도 허술하고, 문은 사방으로 나 있고 각 층마다 벽면은 없는데 몸체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조그마한 지붕만 13층(우리나라에서 유일)으로 켜켜이 쌓여있는 모양새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의 눈에도 독특하지만, 탑을 잘 알고 보는 이에게는 더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 형태이다. 괜히 국보가 아니지.
많은 이들은 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을 접하며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하지만, 내게는 여전히 하늘 아래 긴 세월 견뎌온 석조문화재만한 예술작품은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경주에서 불국사 삼층석탑 외에도 통일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탑을 꼽으라면 역시나 감은사지 삼층석탑을 빼놓을 수 없다. 탑은 대게 외딴 곳에 홀로 지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대부분 사찰이 있고, 그 안에 금당(대웅전, 극락전 등)과 탑을 배치하는 양식을 띈다. 금당과 탑이 각 1개씩이면 '단탑가람', 금당이 1개에 탑이 2개이면 '쌍탑가람'이라고 흔히 부르곤 한다. 감은사지는 석탑으로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쌍탑가람이다.
그 말인 즉슨 감은사지 역시 현재는 절 터만 남아있지만, '감은사'라는 큰 절이 있던 장소였다는 점.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사실이다.
처음으로 감은사지 탑을 보는 사람들은 아마 제법 놀랄 것 같다. 2010년인가, 내가 처음 탑을 마주했을 때도 그런 느낌이었으니. 내 경험으로는 종묘를 처음 보았을 때 이후 가장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이 후로 몇 군데에서 여러번 더 경험했지만.
정말 크다. 사진으로 느껴지는 위용보다 훨씬 거대하다. 처음 백제시대에 우리나라에 탑이 생긴 이후로 조선시대에 접어들기까지 절제미를 드러내며 그 크기가 점차 축소되어왔지만, 건립 연대가 빠른 초기의 석탑들은 대체로 크다. 그래서 8세기 정형기보다 조금 앞서있는 양식이라고 하여 경주의 고선사지 삼층석탑과 함께 '전형기 석탑'으로 분류된다.
맨 꼭대기에 '찰주'라고 부르는(갖은 장식 역할의 조형물들이 있는 '상륜부') 쇠꼬챙이 같은 기둥까지 포함하면 무려 13.4m다. 현존하는 우리나라의 쌍탑 중 가장 크다.
감은사는 대략 신라가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시기에 건립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신라인의 위상을 보여주는 탑이다. 더불어 창건 배경에 호국적인 의미도 곁들어있어, 통일 이후 부처님의 힘을 빌려 적을 물리치겠다는 의지를 볼 수 있다.
감은사지는 그 위치가 바다와 가깝다는 점도 있지만, 빽빽하게 들어찬 대나무 숲과 감은사가 내려다보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정말 좋은 위치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감은사지 구경을 마치고 돌아나가려는 길, 천년이 훌쩍 넘은 금당 터와 탑 만큼은 아니지만 어느덧 그 주변에서 제법 오랜시간 시간을 보내온 것처럼 보이는 가게들이 있다.
요즘 같이 경기가 어려운 시절에 영업을 지속할 수 있을런지 의문스럽지만, 무더웠던 날씨에도 문을 활짝 열고 언제 올 지 모를 다음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감은사지를 빠져나와 차로 채 5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에 이견대와 문무대왕릉이 있다. 전혀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문무대왕 수중릉과 만파식적 이야기는 어릴 적 얼핏 들어본 기억이 있을 테다. 조금도 기억에 없다면 살아오면서 더 많은 좋은 경험을 하느라 기억이 안나는 것이겠거니, 하며 어쩔 수 없겠지만.
오랜만에 바닷바람을 쐬고 싶기도 했던 차에 이견대로 향했다. 날이 흐릿해서 별로였던 탓인지, 해안가도 한산했다.
수중릉으로 유명한 경주 문무대왕릉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하고도 바다에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으로, 문무왕 본인의 유골을 바다 가운데의 바위 일대에 뿌리도록 했다고 전해진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네 갈래로 길이 나있어 물이 드나들 수 있고 바위의 가운데가 파여있다. 자연적 물길에 인공의 흔적이 있다고 한다.
허나 해안선에서 200m 가량 떨어졌으니 실물을 보긴 어렵다. 사진은 각자 찾아보는 것으로.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이 아버지의 뜻을 기려, 감은사까지 창건하였으니 당시 왕들은 나라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컸을지 조금이나마 짐작해본다.
오늘날 나라의 소위 상류층,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정녕 나라의 안위와 번영이 본인의 명예와 권력보다 우선일지 의문을 가져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