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1980년대, 내 아버지는 비료공장의 오너로서 성공적인 삶을 살고 계셨다. 하지만 김대중 대선 후보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한 것이 화근이 되어, 아버지의 회사는 어느날 갑자기 부도 처리되고 말았다. 그 결과,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김대중 후보와의 후원금 그 거래를 증명하는 김 후보의 싸인이 새겨진 빨간색 스카프 한 장과 거액의 빚이었다.
당시 나는 국민학생이었고,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우리 가족은 빌라 생활을 청산하고 본드 냄새가 나는 작은 신발 공장 옆 단칸방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떠돌이 신세가 되셨고, 엄마와 형은 제과점을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형은 대학에서 자신의 꿈인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제빵사가 되어야 했다. 엄마가 제과점을 차렸지만, 채용한 제빵사가 술을 마시고 출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형은 어쩔 수 없이 제빵기술을 배워 일을 하며 취업을 미루어야 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형과 엄마는 종종 다툼을 겪었다. 두 분이 싸울 때마다, 나는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상황에 놓였다. 단칸방에서 오갈 데가 없어, 나는 당시 500원을 주면 24시간을 지낼 수 있는 만화방에서 밤을 지새우고 학교에 가곤 했다.
일이 있던 그날도 내 생일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형과 어머니의 싸움은 이미 다 끝나 있었고 제과점의 쇼윈도는 모두 깨져 있었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형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신의 꿈을 위해 제과점의 집기를 모두 부수고 말았던 거였다.
학교에선 이런 내 사정을 알 리 없었다. 다 망하고 새로 이사 간 동네가 단지 방배동이라는 이유로 선생님들 나를 보며 '팔 학군’이라는 이야기만 하셨다. 그래서 아이들은 나를 동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아이들 모두가 우리 부모님이 성공해서 이사 간 줄 알았을 거다. 하지만 전교 상위권이자 반장까지 하던 내 성적이 계속 떨어지자, 선생님과 친구들은 나를 향한 동경이 조소로 바뀌기 시작했다. 심지어 우리 집에 오고 싶어 하며 나를 따르던 친구가 내 멱살을 잡기도 했다.
나는 엄친아에서 왕따로 전락했다. 결국 형과 어머니의 불화로 우리 집은 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러나 집을 얻을 돈아 없어 이모님 댁에 얼마의 월세를 제공하고 살기로 했다. 난 이모님의 집 지하실 방에서 10살 많은 사촌 형과 함께 살게 되었다. 명문대생이던 사촌 형은 멀쩡 할 땐 너무 좋은 형이지만 술에 취하기만 하면 나를 괴롭히고 때렸다. 하지만 이 사실을 모르고 엄마는 사촌형에게 내 공부를 봐달라고까지 했다.
매 시간 죽고 싶었지만 결국 이 괴롭힘이 심해져 부모님이 이 사실까지 알게 되시면서 우리 가족은 또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런 지옥 같은 환경에서 나에게 웃음을 주었던 유일한 친구가 바로 라디오였다.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두려움을 이겨냈고 신해철의 “밤의 디스크쇼”를 들으며 라디오 DJ가 되고 싶다는 꿈을 키웠다.
이사를 하곤 그 악마 같던 사촌형에 대한 트라우마는 사라졌지만, 덕분에 다니던 학교까지 통학거리가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이동… 그때마다 나는 항상 이어폰을 귀에 꽂고 다녔다. 신해철의 음악을 들으며, 용돈은 거의 카세트 플레이어를 돌리는 건전지 값으로 들어갔다. 돈이 떨어지면 건전지를 이(치아)로 물어뜯어 수명을 늘리기도 했다.
당시 나에게는 두 가지 소원이 있었다. 하나는 충전이 되는 일제 워크맨을 가지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가수 신해철을 만나는 것이었다. 크리스천이던 나는 절실하게 기도했었다. 그를 좀 만나게 해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신해철을 만날 기회는 없었고, 외산 워크맨도 부모님께 사달라 부탁할 수 없는 가정형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학력고사에서 수능시험이 처음으로 도입된 세대가 바로 우리 세대다. 나는 첫 수능 시험의 모의고사에서 2등을 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담임 선생님은 존재감 없던 나에게 기대감이 생기셨는지 나를 데리고 진학 상담까지 하셨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시종일관 신해철 같은 라디오 dj가 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당시 대학생이 가수가 되려면 대학가요제에 나가야 하고 일반인은 강변가요제에 나가야 하는 공식이 룰처럼 정해져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고등학생이 가수가 되는 길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 보다도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바로 sbs 서울 방송이 개국을 하면서 가요제가 열린다는 것이었다. 가수 김완선 씨가 가요제를 홍보하면서
“이번엔 당신이 주인공입니다.”
라고 했던 이 말이 어찌나 나에게 말하는 것 같았던지... 거기다가 참가 자격 또한 파격적이었는데 나이나 학벌 제한이 없는 오디션이었다. 현존하는 가수 등용문의 룰을 완전히 깨부순 나에게는 너무도 혁신적인 오디션이었다. 나는 방송국에 가서 원서를 받아 작성하곤 바로 그룹사운드를 결성했다. 그리곤 직접 멜로디온으로 작곡을 해서 노래에 가사를 붙이고 편곡은 당시 음대에 다니던 교회 누나에게 부탁을 해서 곡을 완성했다.
우리 팀은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늦은 밤까지 합주
연습을 했다. 그리곤 대회 당일 나는 학교에 쪽지 한 장만을 달랑 남기고 무단으로 학교 담장을 넘어서 대회에 참가를 했다. 그 쪽지의 내용은 대충 이랬다.
“선생님. 인생의 3번의 기회 중에 첫 번째가 온듯합니다. 꼭 합격하고 오겠습니다. “
당시 우리 밴드의 팀원은 색소폰, 드럼 그리고 키보드와 여성 보컬, 메인보컬로 이루어진 다소 변칙적인 팀이었는데 사실 말이 좋아 변칙이지 기타리스트를 구할 수 없어서 2% 부족하게 만들어진 팀이었다. 오디션 시간이 다 되어가자 팀원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는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바로, 드럼 파트를 맡은 친구가 도착하지 않는 거다. 일렉기타가 없는 우리 곡에는 반드시 드럼 파트가 있어야 임팩트를 줄 수가 있는데 아마도 드럼 치는 친구가 학교에서 조퇴를 하지 못한 듯했다.
결국 우리는 드럼 파트 없이 노래를 하고 오디션장을 빠져나왔다. 근데, 이제야 하는 이야기지만 그 대회에는 당대 최고의 보컬리스트 소찬휘 씨가 2위를 할 정도로 실력파 뮤지션들이 많이 참여를 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 비해 가창력도 팀의 합주 실력도 떨어졌던 게 사실이었다. 그걸 나만 몰랐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