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남도, 막내도 아니었던 아들의 고백
외출한 어머니가 아내에게 전화를 해오셨다.
“부동산으로 나와. 돈 준비해서 계약해.”
옷을 차려입고 나가신 어머니는 이미 집을 알아보고, 모든 결정을 홀로 끝내신 듯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랐지만, 아내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어머니가 집 계약을 마무리하도록 했다. 군말은 없었다. 그저 어머니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새 가전이 들어오고 이사까지 끝냈을 때, 우리는 최소한 “고생했다”는 말쯤은 들을 줄 알았다.
그러나 어머니가 내민 것은 뜻밖의 문서였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집을 처분하지 마라.”
그게 전부였다.
당연한 일을 굳이 문서로 남기고, 변호사 공증까지 받겠다는 어머니 앞에서 우리는 비참한 마음으로 도장을 찍었다. 도장이 찍히자, 그제야 어머니의 얼굴이 풀렸다.
“이제 밥이나 먹자 “
그 이후 어머니는 달라지셨다. 해외여행을 다니고 외국어를 배우며 노후를 즐기셨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기뻤다. 차라리 전도사 일을 그만두고 돌아오셨을 때부터 따로 살았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풀린 매듭은 어머니와의 관계뿐이었다.
왕래 없던 형은 어머니 집에 드나들기 시작했지만, 나와는 여전히 연락조차 없었다.
언젠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형의 새 아내와 아이를 장례식장에서 처음 마주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들과 맞닥뜨릴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머니께 형 식구들과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 달라 졸랐다.
형이 그리워서가 아니었다. 장남 역할을 하지 않는 그를 대신해서였다.
몇 달 후 성사된 첫 만남.
낯설었지만, 좋든 싫든 가족이라면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다. 조카아이에게는 이상하게도 눈길이 갔다. 핏줄이라는 이유였을까.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애써도 이어지지 않는 관계 앞에서, 나는 내 존재의 뿌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나는 혼외자, 아니면 사생아가 아닐까.’
그러나 거울 속 얼굴은 너무도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그 이후 어머니는 형의 새 가족들과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하셨다.
나와 내 가족은 다시 완전히 배제되었다.
만약 내 삶이 그들에게만 기대어 있었다면, 나는 이미 무너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린 시절의 방황을 딛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왔고, 그 대가로 여러 성과를 거두며 이름도 알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장모님이 계셨다.
처음 국비 지원을 받아 해외 전시에 나갔을 때, 내 어머니는
“너 혼자만 해외에 나가니 좋니?”
라고 말했지만, 장모님은 내 손을 잡고 우셨다.
“우리 아들, 고생한 보람이 있네.”
그 한마디에 평생의 설움이 녹아내렸다.
그렇게 장모님과 손윗처남은 친어머니와 형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피보다 진한 인연이 있다는 걸, 그들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 편히 딸 집에 와보지 못했다. 항상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딸을 안쓰러워하는 데에 급급했고, 혹시라도 자신들이 사위 집안, 정확히는 딸의 시어머니 심기를 거스를까 봐 사위 집에 오는 것 자체를 조심스러워했다.
내 어머니가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자식들이 나를 떠받들며 산다’는 모습을 은근히 세상에 드러내는 것, 그 만족감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두 손주를 직접 돌본 기억은 거의 없다. 매번 말로만 사랑한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말뿐. 하지만 어머니의 따로 집을 얻어 나가신 뒤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아내는 일이 생겨 아이들을 맡길 곳이 필요할 때마다 자연스레 장모님을 찾게 되었고, 아이들은 장모님의 사랑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
————
어느 날, 어머니가 다시 나를 호출하셨다.
형과 해외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이었다. 모든 경비는 형이 댄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이고 당부했다.
“코로나 팬데믹이라 해외 나가려면 백신 접종 확인서가 꼭 필요해요.
영문으로 떼셔야 합니다.”
여행 당일, 어머니를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렸다.
공항 리무진에 올라탄 어머니의 뒷모습은 유난히 가벼워 보였다. 보기 좋았다.
그러나 그 기쁨은 네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어머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형의 새 아내였다.
“지금 출국해야 하는데요, 코로나 백신 확인서가 한글이에요.
아드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다면서요?”
숨이 막혔다.
나는 이미 수차례 해외 출장을 다녔고, 영문 증명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드렸다. 주민센터에 함께 가겠다는 제안도 거절하셨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책임이라 했다.
“백신 확인 앱도 깔아주셨다면서요? 비밀번호가 뭐예요?”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몰아붙였다.
상황은 뻔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실수를 덮기 위해 나를 내세웠고, 그들은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마치 내가 여행을 방해하려 일부러 꾸민 사람처럼.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이 사건 하나가 아니라, 내 인생 전체가 그들에게 모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기억이 배경이 되었지만 모든 인물, 사건, 지명은 저자의 창작적 산물이며 현실과의 유사성은 우연일 뿐입니다. - 최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