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인정하지 못하는 병, 치매

치매보다 더 무서운 현실

by 최호림

병원 복도의 형광등이 무심히 깜빡였다.

내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이 떠돌았다.

하루라도 빨리 요양등급을 받아야 한다.


병원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루이소체 치매가 파킨슨병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그 순간, 누군가 내 목덜미를 움켜쥐어지듯 숨이 막혀왔다.

외삼촌이 파킨슨병으로 오랜 세월 투병 중 떠나가시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런 가족력을 지닌 어머니가, 기억마저 잃는다면…


그러나 병보다 더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간병 비용이었다.

중증 환자로 투병하시는 장모님을 통해 알게 된 현실, 간병비는 하루 최소 15만 원. 병세가 깊어질수록 ‘옵션’처럼 금액이 덧붙었다.


물론 그 돈이 간병인의 노고를 측정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밤을 새우며,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하는 그 고된 노동을 어떻게 돈으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중증환자가 간병 보험이나 실비 보험이 하나 가입되어 있지 않다면

이는 집안의 기둥뿌리 하나가 뽑혀나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는 손 닿는 대로 정신없이 전화를 걸어야 했다.

그리곤 여러 차례 시도 끝에 사설 노인복지센터의 대표와 연결되었다.

그는 어머니를 직접 만나 뵙고 돕겠다고 했다.

잠시, 안도했고 눈물까지 핑 돌았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어머니였다.

수화기 너머로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형한테 준 돈을 문제 삼고,

나를 노망 난 늙은이로 만들려 하냐.”


어머니는 다시 단호히 말했다.

“네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

아프다고 봐줬더니!!

너는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마라.”


뚝. 통화가 끊겼다.

가슴이 조여 오고 손끝이 저려왔다.

나는 확신했다.

형이 어머니로 하여금 치매 사실을 부정하게 만들고 있다고.

“도대체… 왜?”


답답한 마음에 형의 지인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모두 같았다.

“오늘도 통화했는데,

네 형이랑 다음 주에 골프 약속 잡았어.”


그리고 덧붙이는 한마디.

“요즘 네 형 사업이 힘들대.”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지막 기운마저 빠져나갔다.

머릿속엔 온갖 불길한 상상이 소용돌이쳤다.

이대로라면 뇌경색이 다시 재발할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형의 새로운 부인은 자신의 딸에게 고액의 영어유치원을 보내고

서울 부유층과 유명인들만 보낸다는 초등학교에 입학시켜 형 자신이 과거에 이혼한 형수의 고액 교육비가 불만이라는 말을 무색하게 하고 있었다.


화가 난 어머니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문자가 도착했다.


네가 무슨 짓을 했기에

평생 화 한 번 내지 않던 착한 네 형이 내게 화를 내냐.

네가 내 재산을 모두 훔쳐갔다는 내용을

자필로 적어달라 했다.

네 안쓰럽고 착한 형에게 빨리 사과해라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오만 정이 모두 떨어졌다.

더는 버틸 이유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담담히 결론을 내렸다.

어머니와 형이 원한다면 그대로 두면 될 일이다.


‘치매는 빨리 치료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다시는 두 분께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

이 문자와 함께 나는 가족을 버렸다.


다음날, 아내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나와 살아줘서 고마웠다…

집도 얻어줘서 노후가 편했다.”

어머니였다. 어린아이 같은 목소리.

아내의 눈가에는 눈물이 번졌다.


하지만 며칠 뒤, 다시 걸려온 전화는 달랐다.

“네가 내 집을 빼앗아 갔다. 이 도둑년…“

아내는 그 호통에 무너져 내렸다.


시어머니의 망상과

장모님의 위중한 병세 사이에서 아내는

점점 눈의 초점을 잃어갔다.

장모님 한 분으로도 이미 힘든 상황인데

시어머니까지 저러시니 눈가엔 공허함 마저 느껴졌다.


그러나 어머니의 전화는 멈추지 않았다.

“내가 말 안 했지?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어.”

그러나 아파트 관리소장도, 출동한 경찰도, 관리

사무소에 CCTV에서도 그 어떤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본 도둑은 집안의 물건이 아니라,

당신의 기억을 훔쳐 간 자였으리라.

그다음 날에도 어머니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내에게 웃으며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괜찮다.”


집으로 한 통의 내용증명이 도착했다.

봉투 위에 적힌 형의 이름.

편지 안에는 네 집을 빼앗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치매 걸린 어머니를 내세운

형의 계획이 마침내 현실이 된 것이다.

13년 동안 우리 부부는 아픈 부모를 돌봤다.

새벽마다 약을 챙기고, 병원 기록을 가방에 넣고,

밤이면 숨소리를 확인했으며 아픈 부모의 대소변을 치웠다.


돌봄이 삶이었고, 어찌 보면 간병으로 가득했던 그 집은 우리 부부의 신혼을 사라지게 한 애증의 무대였다.


허무함과 공허함이 나를 감싸며

모든 것이 살아 있으나

동시에 부재한 것처럼 느껴졌다.

너무도 비참한 현실이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형, 아니 그 사람이

어머니에게 거짓 서류를 작성하게 한 정황 증거,

그리고 집을 빼앗겠다며 수 차례 내게 퍼부은 위협이 담긴 녹취까지 모두 챙겨 들고 경찰서로 향했다.

이 작품은 작가의 기억이 배경이 되었지만 모든 인물, 사건, 지명은 저자의 창작적 산물이며 현실과의 유사성은 우연일 뿐입니다. - 최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