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곡동 판자촌, 뿔테 안경의 청년 정치인을 기억하십니까?
서울 난곡동의 공기는 묘했다. 국민학교 시절, 부모님을 따라 이사한 곳은 신축 건물인 '관악구의 삼천리빌라'였다. 지금은 고층 아파트로 변모했지만, 당시엔 사방이 판자촌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동네에서 우리 집은 보기 드문 '고급 주택'으로 통했다. 아래층에는 유명 가수 이미자 씨의 딸이 친척 집이라며 머물기도 했다. 화려함과 척박함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공존하던 시절, 그 풍경은 당시 난곡동 사람들의 삶이 지닌 흑과 백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날, 전학 간 난곡 국민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를 따라 녀석의 집에 갔다. 나는 그 집 앞에 서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난생처음 보는 대문도 없고 슬레이트와 판자를 얼기설기 엮어 만든 가건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지붕은 군데군데 뚫려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어린 마음에 "비가 오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그 구멍 난 지붕 아래 부엌에서 친구와 함께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날의 냄새와 풍경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잊히질 않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전신주에 붙은 선거 포스터 하나가 발길을 잡았다. 각진 턱에 뿔테안경을 쓴, 아이 눈에도 강직해 보이던 젊은 정치인의 얼굴이었다. 포스터에는 '평민당 이해찬'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외모가 인상적이었다기보다, 그 낯선 이름이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 남았다.
얼마 후 관악구를 무대로 출마한 그는 결국 당선됐다. 정치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어린 나였지만 그때 처음으로 누군가의 당락을 끝까지 지켜보며 '정치'라는 실체를 의식적으로 바라보게 됐다. 정치색과는 무관하게, 그의 당선이 반가웠고 그저 내가 아는 사람이 이겼다는 사실이 기뻤을 뿐이었다.
당시 신림사거리로 나가는 버스는 늘 눈물바다였다. 서울대학교 앞을 지날 때마다 터지는 최루탄 연기, 보도블록이 깨져 날아다니는 거리. 버스 안에서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나는 투덜거렸다.
"어른들은 왜 맨날 저렇게 싸우기만 할까."
그 무렵 아버지는 평민당 김대중 후보를 직접 만났다며 그의 싸인이 새겨진 붉은색 스카프 한 장을 집에 들고 오셨다. 고무된 아버지덕에 집안 분위기가 잠시 들떴지만, 그 온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2천여 명의 직원을 두고 있던 아버지의 공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도를 맞았기 때문이다.
그땐 몰랐지만, 성인이 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50대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언은 단 하나였다.
"절대 정치 바닥에는 기웃거리지도 마라."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당시 야당에 건넸던 정치자금 문제로 회사 운영자금이 금융권에서 막히며 인생의 쓴맛을 봤다고 한다. 하루아침에 공장은 멈췄고, 삶의 기반은 무너졌다. 고급 빌라에 살던 우리 가족은 판자촌으로 내몰렸다. 그 사이 정부와 손잡았던 대기업은 아버지의 회사를 흡수했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승승장구하고 있다.
26일 어제,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별세 소식을 접했다. 정치적으로 화려했던 그의 이력들보다 내 머릿속을 먼저 스친 건 난곡동 전신주에 붙어 있던 그 한 장의 포스터였다. 정치 거인이 아닌, 판자촌 한복판에서 첫발을 내디뎠던 정치 초년생의 이해찬의 얼굴 말이다.
그는 내 삶에 직접적인 혜택이나 피해를 준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궤적은, 내가 살던 공간과 한국 민주화의 굴곡진 역사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관통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이정표였다. 난곡동의 판잣집, 최루탄 가루로 가득하던 대학가, 아버지의 붉은 스카프와 부도의 기억. 그 모든 장면은 '이해찬'이라는 이름과 함께, 한 개인의 삶을 통과해 간 격동의 세월로 남아 있다.
그래서 나에게 '이해찬'이라는 이름은 거물 정치인이기 이전에, 난곡동이라는 시공간과 함께 떠오르는 시대의 증언이다. 그의 안타까운 퇴장은 그 시절 한국 사회가 얼마나 거칠고 치열하게 민주주의의 터널을 통과해 왔는지를 다시 묻게 한다.
난곡동 전신주에서 마주했던 그 청년 정치인의 얼굴은, 그렇게 지금도 내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