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말하려 했으나… 정말 어쩔 수가 없다

리뷰> 박찬욱의 신작이 그려낸 ‘한국 중년’은 왜 공감에 이르지 못했을까

by 최호림

박찬욱 감독의 신작 〈어쩔 수가 없다〉를 극장이 아닌 OTT 채널을 통해 관람했다. 〈올드보이〉 시절부터 그의 신작이 나오면 극장을 찾는 것은 팬으로서 일종의 의례와 같았다. 처음 마주하는 박찬욱의 신작은 ‘당연히’ 커다란 스크린에서 마주해야 할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며 초반에는 팬으로서 자책감이 앞섰다. ‘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았을까’ 하는 무심함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만큼 배우 이병헌의 화면 속 중년의 얼굴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었다. 삶의 무게에 서서히 짓눌려가는 한 남자의 표정이 정면으로 다가올 때, 영상의 음향과 영화의 결은 〈친절한 금자 씨〉 등 전작들이 보여준 미학적 완성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 또한 유독 현실에 밀착해 있었고, 그 지점은 익숙했던 박찬욱의 세계와는 또 다른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


문득 엉뚱한 질문이 스쳤다. 박찬욱 감독 역시 ‘금수저’가 아닌 ‘흑수저’의 시간을 통과해 온 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위기에 몰린 한국 중년의 삶을 묘사하는 그의 연출은 벼랑 끝으로 내몰린 현실을 지나치다 싶을 만큼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년 남성에게 닥친 가혹한 상황과 이를 버텨내려는 몸부림은 영화 초반부까지 충분한 설득력을 확보한다.


하지만 영화가 중반을 지나 후반부로 향하면서 의구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아니다. 출연진은 각자의 자리에서 밀도 높은 감정을 쌓아 올린다. 문제는 그 연기들이 떠받치고 있는 이야기의 방향성이다. 영화는 중년의 몰락을 통해 가족 전체가 흔들리는 과정을 다루지만, 그 전개는 어느 순간 현실의 비극이 아니라 한 남자의 기이한 행동극처럼 비친다.


특히 한국 사회 중년의 생존 투쟁을 다룬다면서, 인물들이 어느 순간 ‘포카혼타스’가 되고 ‘나폴레옹’이 되어 삶을 전쟁처럼 치른다는 설정은 끝내 정서적 공감에 이르지 못한다. 자동차 안에서 치킨을 먹고 이를 방치하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장면이 과연 혼밥조차 두려워지는 이 시대 중년이 겪는 절박한 생존의 압박을 얼마나 대변하고 있는지 의문이 남는다. 차라리 소주와 사발면이었더라면 더 많은 현실 중년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을까.


다만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는 있다. 〈어쩔 수 없다〉는 미국 소설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더 액스(The Ax)〉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이미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에 의해 〈액스, 취업에 관한 모든 것〉으로 한 차례 영화화된 바 있다. 원작 자체가 실직한 중년 남성의 몰락을 블랙 코미디와 슬래셔적 장르 문법으로 비틀어낸 작품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화 속 ‘기이한 행동극’이나 ‘나폴레옹’ 같은 설정 역시 이러한 장르적 특성을 한국적으로 이식하려는 과정에서 발생한 결과로 볼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남는다. 원작의 블랙 코미디적 과장이 한국 사회의 현실과 만나는 순간, 그 비틀림이 풍자가 되기보다는 이질감으로 남았다는 점이다. 장르적 장치가 현실을 비추기보다 현실과 분리된 상징으로 작동할 때, 관객은 웃음 대신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이번 작품에서 그 간극은 특히 중년의 삶을 다루는 대목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박찬욱 특유의 연출은 여전히 날카롭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 그 칼날은 현실을 깊이 파고들기보다 현실과 어긋난 허공을 향해 휘둘러지는 인상이 짙다. 상징과 과장이 예술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실제 현실을 살아내는 중년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고 때로는 불편함마저 느껴진다. 누군가는 세상 어딘가에선 충분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가능성만으로 영화 전체의 설득력을 담보할 수는 없다. 초반의 긴장과 현실감은 후반으로 갈수록 희미해지고, 기대는 실망으로 기울었다.


한국 영화는 결국 한국적 맥락 안에 있어야 한다. ‘할아버지’라는 상징을 통해 보수적인 한국 사회를 말하고자 했다면, 그만큼 더 치열하게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고 리서치했어야 한다. 이 작품에 박찬욱 감독은 익숙한 미장센과 상징의 반복을 넘어,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 중년의 구체적인 감정과 구조를 자신의 작품 세계에 더 깊이 투영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영화를 보고 난 뒤, 배우 오달수의 극 중 대사가 문득 떠올랐다.

“그런 말로 농담하시는 게 아니에요~“


그 대사는 영화 관람 후 더욱더 내 가슴에 사무치는 대사가 되어버렸다. 그리곤 현실 중년의 입장에서 박찬욱 감독에게 되묻는 말처럼 들렸다.

“아무리 절실한 중년의 위기라 하더라도, 그렇게 묘사하시는 게 아니에요~“


솔까말로 현실 중년의 좌절은 판타지가 아니라 한국 사회 구조의 문제이고, 기행이 아니라 오랜 시스템에 대한 잘못을 침묵과 방관 누적해 온 실패의 결과다.


박찬욱 감독의 예술적 성취가 독보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성만으로는 더 이상 현실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화려한 카메오와 배우들의 열연이 오히려 아깝게 느껴지는 이유다. 현실을 말하려 했으나 끝내 현실에 닿지 못한 영화, 〈어쩔 수 없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적 언어는 한 시대를 정의했다.

그러나 ‘올드보이’ 이후의 세계는 더 이상 같은 질문에 같은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는다.

복수와 파국, 뒤틀린 욕망이라는 그의 익숙한 문법은 이미 충분히 반복되었고, 이제는 날이 무뎌졌다.

거장은 반복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신화를 넘어설 때 증명된다. 이제 박감독에게 영화 친구의 장동건의 심정으로 말해본다.

“고마해라~ 마이 묵읏다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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