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웃음기 뺀 장항준의 승부수 <왕과 사는 남자>

"기록엔 왜소하다는데..." 유지태의 거구 한명회가 설득력 있는 이유

by 최호림

신작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보며 가장 먼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든 지점은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의 등장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허구를 가미한 '픽션'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우리가 역사 속에서 배워온 한명회와는 외형부터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사료에 남은 한명회의 외모 기록을 종합하면 그는 키가 작고 왜소한 체구였으며, 얼굴 또한 수려하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대신 눈매가 날카롭고 인상이 차가워 눈빛 하나로 사람을 압도했다는 묘사가 반복된다. 외형의 미려함보다는 기세와 기민함, 주변의 공기를 단번에 장악하는 분위기가 강한 인물이었다는 점이 공통적인 중론이다.


<세조실록>은 한명회를 두고 "용모로 사람을 끄는 인물이 아니라, 말과 계책으로 사람을 움직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문장을 곱씹어보면 한명회의 권력은 외모나 체격이 아니라, 계산된 언어와 냉혹한 판단, 그리고 상황을 읽는 정치적 감각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속 유지태의 한명회는 지나치게 크고, 지나치게 정제되어 있다. 위압감은 분명하지만, 사료가 전하는 '작지만 날카로운 정치가'의 실루엣과는 결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태의 눈빛은 실화보다 더 실화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며 영화 전반을 장악한다. 그의 한명회는 역사적 외형과의 괴리를 안고 있으면서도, 권력의 냄새와 냉기를 온몸으로 풍기며 극의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한다. 사료와의 불일치는 남을지언정, 권력을 쥔 자의 계산과 냉혹함이라는 본질만큼은 집요하게 파고든 연기다.


문헌 속 한명회와 유지태의 외형적 괴리는 어쩌면 감독의 계산된 연출일지도 모른다. 영화는 유독 유지태의 날카로운 눈빛을 반복적으로 클로즈업하는데, 이는 한명회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각인시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읽힌다. 실제로 배우 유지태는 이 역할을 위해 체중을 증량했고, 화면은 거대해진 배우의 몸 위에 문헌 속 한명회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쪽 찢어진 듯 서늘한 눈빛'을 덧입힌다. 그 결과 우리가 알고 있는 한명회와는 전혀 다른 외형임에도 불구하고 위압감은 오히려 강화되며, 오직 눈빛 하나만으로도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 위협적이고 압도적인 한명회를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이러한 존재감은 유해진의 인생 연기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엄홍도' 역을 더욱 빛나게 한다. 권모술수의 한복판에 선 한명회와, 충절과 인간적 고뇌를 품은 엄홍도의 대비는 영화의 정서적 축을 단단히 세운다. 특히 아들을 사이에 두고 부정(父情)과 충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엄홍도의 내면을 그려내는 유해진의 연기는, 유지태가 연기한 한명회의 냉혹한 눈빛과 맞물리며 한층 깊은 울림을 만들어낸다. 한쪽이 차갑게 몰아붙일수록, 다른 한쪽의 흔들림과 고뇌는 더욱 선명해진다.


두 인물이 만들어내는 긴장은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어, 선택의 순간에 인간이 짊어져야 할 책임과 무게를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달한다. 이 대비는 자연스럽게 영화의 중심에 놓인 또 하나의 비극으로 이어진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나 정치를 직접 펼치기도 전에 권력 다툼의 한복판으로 내던져진 단종. 왕이었지만 유배지에서 자신의 백성인 엄홍도를 만나며 인간적인 부정(父情)을 느끼는 '이홍위', 그리고 그 마음을 알면서도 끝내 백성으로서의 충정을 선택하는 엄홍도의 관계는 신분 제도가 엄존하던 시절의 미묘한 경계를 조심스럽게 넘나 든다.


군주와 신하, 어른과 아이, 권력과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두 인물의 감정선은 역사극을 넘어 인간 드라마로 확장되며 극의 완성도를 높인다. 결국 왕의 이름마저 빼앗긴 채 '이홍위'라는 개인으로 전락해 가는 과정은 한층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영화를 연출한 이가 장항준 감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관람했다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깜짝 놀랐을 법하다. 그동안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드러났던 가볍고 코믹한 연출이 때로는 과하게 다가왔던 기억 때문이다. 그러나 <왕과 사는 남자>에서 장항준은 웃음을 철저히 절제하고, 인물의 감정과 서사에 깊숙이 침잠하는 선택을 했다.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되는 놀라울 정도의 진지함은 이 영화가 남기는 가장 강렬한 인상 중 하나다.


그건 다양한 예능에서 보여준 그의 유쾌하고 다소 과장된 이미지에 익숙했던 관객에게 이번 작품은 낯설면서도 반갑다. 비극적 역사와 인간의 내면을 차분하게 응시하는 연출은 '감독 장항준'의 이름을 다시 보게 만든다. 과장 대신 절제를, 웃음 대신 침묵을 택한 이 변화는 영화의 비극적 무게를 든든하게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으로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장감독이 연출한 전작 <리바운드>에 이어 이제는 장항준의 페르소나처럼 느껴지는 배우 정진운을 비롯해 다양한 배우들이 카메오와 조연으로 등장해 예상치 못한 순간마다 영화의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그 결과 <왕과 사는 남자>는 2월 6일 현재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관람객 평점 9.14점, 누적 관객 수 36만 명을 넘기며 순항 중이다.


단순한 흥행 성적을 넘어, 배우들의 열연과 역사적 인물에 대한 성공적인 재해석이 관객의 깊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어디까지 질주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