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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Feb 01. 2018

브랜드란

회사 로고나 브랜드, 혹은 정부기관의 상징물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종종 주체성과 정체성을 동일시하거나 둘의 경계를 헷갈려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한다. 이런경우 브랜드 제작 과정이나 결과물이 영 어색하게 나온다. 가령 상징물을 의뢰하는 사람이 고집이 세거나 취향이 너무 강할 경우, 그 상징물의 주인공은 결과물에 만족하지만 브랜드를 접하는 이들은 영 마뜩치 않다. 이는 브랜드 전략의 실패로 이어질 뿐만이 아니라 역효과까지 일으킨다. 디자이너로서 이런 결과물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야 할때 느끼는 자기배반의 고통은 상당하다. 더구나 댓가마져 쥐꼬리 같다면 그 과정에서 느끼는 상실감, 소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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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늘 우리를 따라 다니는 질문이다. 이를 규정하기 위해 로고니 브랜드니 하는 용어가 요구된다. 이를 통칭해 아이덴티티라고 하는데 이는 '정체성'이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이덴티티를 '정체성'이라 읽고 '주체성'으로 해석한다. 즉 주체성과 정체성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앞선 기묘한 사태가 발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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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역사는 디자인된다>의 마지막 목차, '나오며'에 주체성과 정체성을 구분해서 짧게나마 현재 디자인계의 문제를 분석했다. 인간은 누구나 주체성과 정체성이 모두 필요하다. 만약 주체성이 없고 정체성이 과잉이면 그 사람은 노예가 된다. 반대로 정체성이 없고 주체성이 과잉이면 그 사람은 왕따가 된다. 주체성과 정체성이 조화와 균형을 이룰때만 인간은 노예도 왕따가 아닌 하나의 인격으로 인정받는다. 다시말해 자기 소외에서 벗어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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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성은 자신이 자신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감각경험으로 인식되고, 기억으로 저장되며, 이성으로 판단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통해 나와 타자 혹은 세상과의 경계가 형성되고 '난 나야'라는 인식이 생긴다. (어렵게 표현한다면 이를 '존재'라 말해도 무방하다.) 이런 주체성이 전제되어야만 정체성이 설 수 있는 기반이 생긴다. 사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체성은 따질것이 별로 없다. 중요한 것은 주체성이 가지는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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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은 타자가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타자 혹은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디에 있는지 아는것, 즉 맥락을 읽는 것이다. 쉽게말하면 눈치가 있는 것, 분위기 파악을 할 줄 아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공간파악 능력이다. 주로 변연계의 해마에서 수행되는데, 해마는 편도체라는 두려움 인식 기관과 아주 가깝게 접해있다. 또한 해마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전환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우리는 해마를 통해 두려움과 기억, 공간인식이 모두 연결된 사태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정체성이란 나 자신이 아는 것이 아닌 타자 혹은 사물 등을 통해 나 자신을 메타적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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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은 20세기 들어오면서 형성된 분야이다. 그 이전에는 정신분석이 딱히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과학적 사고가 덜 발달한 탓도 있지만, 큰 틀에서 볼때 딱히 필요 없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가령 43살이 된 내가 어릴적만 해도 동네에 바보 형이나 누나들이 종종 있었는데 그들은 정신분석을 받지 않았고, 정신병원에 갇히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이들이 어떤 공동체 안에서 이미 어떤 정체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정되고 용서되고 용납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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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가장 큰 특징중 하나가 도시화이다. 영국의 경우 19세기 중반이 도시화률이 50%가 넘었다. 유럽문명의 국가들은 다른 문명국들에 의해 도시화률이 빨랐다. 한국은 아마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그랬을 것이다. 도시는 농촌과 다른 사회적 맥락이 형성된다. 나는 이를 '공동체'와 구분해 '시장'이라 지칭한다. 시장은 일단 익명성이 특징이다. 왜냐면 농촌에 비해 인구가 많고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그런만큼 분위기 파악을 잘해야 한다. 즉 정체성을 규정하고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도시에서는 '이성'이 중요해진다. 나는 '감성'은 공동체의 코드요, '이성'은 시장의 코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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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정신분석 분야도 형성, 발달했다. 이런점에서 정신분석은 농촌보다는 도시, 공동체보다는 시장에서 더 많이 요구된다. 정신분석은 주체성이 아닌 정체성을 파악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정신분석에는 주체적 환자와 주체적 분석가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상호간의 정체성을 찾는다. 둘은 서로 신중한 대화를 통해 '나는 누구인가'를 찾는다(혹은 찾아준다). 다양한 상징장치나 상징어들이 동원되어 나를 다시 이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겪는데, 이때 환자와 분석가 모두 자신을 재구성하는 계기가 된다. 라캉은 이런 전이 과정을 주목했던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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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라캉의 정신분석>을 읽으며 자꾸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데 그 이유는 내가 디자이너인 탓인듯 싶다. 언젠가 서울시 상징물이 발표되었는데 참담함을 금치 못했던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서울시 디자인위원이었기에 페북 혹은 다른 경로로 상당히 센 발언들을 이어갔는데, 한편으로는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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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나 이외에 많은 디자이너들도 반발을 했는데 많은 분들이 잘못된 결과물의 원인 중 하나로 '시민 참여'를 거론했다. 서울시 상징물을 만드는데 서울 시민이 참여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주체성과 정체성 문제를 따져보면 시민 참여는 상당히 어색하다. 만약 시민이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사용하는 것이라면 시민 참여는 당연하다. 즉 자급자족의 (농촌)공동체 사회에서는 시민 참여로 상징물을 만들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정체성이 강조되는 (도시)시장에서는 전문가가 필요하다. 정신분석의 경우처럼 환자(시민)을 도와주는 분석가(전문가)가 요구된다. 그렇다면 서울시 상징(브랜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시민을 참여시키기 보다는 먼저 시민의 이야기를 듣고 분석하고 제시하는 외부 분석가를 모시는게 마땅했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시민을 참여시켜야 자연스러운 과정이 형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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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는 '주체성'을 많이들 강조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좋은 예술을 하기 위해서 나를 찾아야 한다' 등등 이런 말들은 모두 '주체성'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주체성은 이미 인간에게 주어진 상황이다. 감각이 있는 존재라면 누구나, 생명이라면 무엇이든 주체성이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또 사이코패스가 아닌 인간은 누구나 심지어 대부분의 동식물조차 상대의 주체성을 존중하고 배려하도록 유전적으로 프로그램화 되어있다. 가령 데시벨이 높은 '끼익' 소리는 위험에 처한 동물의 소리와 유사하다. 그래서 칠판을 긁을때 불편한 느낌을 받는다. 이 불편함음 동식물에게도 영향을 준다고 한다. 즉 주체성은 따지고 자시고 할 문제가 아니라 그 존재 자체로 인정받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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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진짜 문제는 '주체성'이 아니라 '정체성'이다. 사실 도시화 시대에 있어 '나는 누구인가' 등 위에 언급된 질문들은 주체성이 아니라 정체성을 따져 묻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늘 브랜드, 브랜드를 강조한다. 정체성을 알기 위해서는 나 뿐만 아니라 타자, 동료, 분석가, 전문가 등등이 요구된다. 자기 내면을 자기 자신이 아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을 통해 자기 내면을 아는 것, 이는 정치경제적 삶이요, 윤리도덕적 삶이다. 이런 점에서 학생을 내버려두고 자기 내면을 쫓고 찾으라는 예술과 디자인 교육은 한참 잘못된 방향이요, 자기 주도적으로 브랜드를 만들려는 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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