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우리에게 이 명제는 절대적이다. 현대 과학이 해결해 주리라 희망하겠지만 먼 미래의 이야기다. 현재로서는 죽음을 피할 방도가 없다. 사실 미래도 믿기 어렵다. 불사의 약을 찾는 신화와 역사적 사실들을 보면 불사의 희망은 늘 있었다. 모두 절망적으로 끝났지만. 아무튼 우리는 죽는다. 그냥 기다리다가 죽어갈 뿐이다. 문제는 그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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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미술에 대한 글을 쓰다보니 '죽음'에 대한 집착을 보게 된다.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죽음과 관련되어 있으며, 상당히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보관되어 왔기에 지금에 이르렀다. 그만큼 죽음을 신성시여기고 긍정했다는 의미다. 조금만 깊게 생각해보면 죽음을 부정하거나 배척하는 태도보다 죽음을 긍정하고 수용하는 태도가 여러모로 유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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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사후세계가 없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 누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누려야 한다. 누굴 돕기 보다는 우선 나의 이익과 쾌락을 최대한 올려야 한다. 그게 공리주의가 주장하는 행복이다. 최대 다수가 최대 행복을 누리기 위해 쓸수 있는 모든 자원을 소모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그래야 보람찬 삶이다. 어짜피 죽음 이후는 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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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는 세상은 정말 끔찍하다. 죽음 이후에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죽음의 긍정이란 미래가 있다는 믿음이다. 그 미래는 사후세계다. 있는지 없는지 확실치 않지만 일단 있다고 믿는 태도다. 굳이 파스칼의 확율을 운운하지 않아도, 이 믿음은 여러모로 유용하다. 특히 삶의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희망'이라는 측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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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긍정하면 두가지 희망이 생긴다. 일단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은 그저 과정일 뿐이다. 죽음 뒤에도 사후세계가 있으니까. 좋은 사후세계를 희망한다면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살아야 한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내 이익과 쾌락 추구가 아니다. 사후세계의 신이 보고 있고, 내 스스로 알고 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임을. 그렇게 살면 천국에 극락에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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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희망은 현세적 희망이다. 내가 죽은 뒤에도 나는 사후세계에서 현세를 본다. 내가 만들어 놓은 값진 결실을 누리는 현세의 후배들을 상상하면 좋을 것이다. 사후세계의 선배들에게도 떳떳할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기 직전이라도 사과나무를 심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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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우리는 어떤가? 과연 죽기직전까지 사과나무를 심고 있는가? 팔팔해도 그런 행위는 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을 부정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다. 어쩌면 어리석은 시대는 구석기나 고대, 중세가 아닐 수도 있다. 가장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우리 시대야 말로 어리석은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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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의 인간연구>를 쓴 철학자 미키 기요시는 이렇게 죽음을 긍정한다. "죽으면 먼저 간 소중한 지인들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정말 그럴까? 후배들이 죽어 내가 있는 사후세계에 와서 "선배가 만들어 놓은 세상이 참 좋았어요. 좀 부족한 면은 제가 보완하고 왔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뿌듯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