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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Dec 06. 2018

연역, 귀납, 귀추

어제는 이상하리만큼 좋은 시간을 보냈다. 우연히 두가지 통찰을 얻었는데, 하나는 토마스 네이글의 책 후기를 읽으며 철학과 과학 그리고 언어가 사유되는 흐름을 파악하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이성민 선생님에게 들은 퍼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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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학교에서 디자이너와 혁명, 도덕, 노동을 주제로 다소 긴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다. 두번째 세션은 김상규 선생님의 책 <디자인과 도덕>을 가지고 김상규 선생님과 이성민 선생님을 모시고 대담을 하려 한다. 이 기획을 말씀드릴겸사 이성민 선생님과 미팅을 했는데 정작 세미나 얘기는 거의 않고, 디자인에 흥미를 갖게 된 선생님이 반가워 주제넘게 여러가지 조언을 하고 미래의 구상을 말씀드렸다. 그 과정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를 공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의 이야기를 듣던 선생님은 최근 번역하시면서 읽는 퍼스의 이야기를 해주셨다. 돌이켜보면 정말 빛과 같은 통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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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하면, 퍼스는 무엇(what)과 어떻게(how) 그리고 결과의 삼항을 가지고 연역과 귀납, 귀추라는 세가지 추론 법칙을 말하는데, '무엇과 어떻게'를 알고 '결과'를 도출하는 것은 '연역', '무엇과 결과'를 알고 '어떻게'를 유추하는 것은 '귀납', '어떻게와 결과'를 알고 '무엇'을 연상하는 과정은 '귀추'다. 보통 연역은 자명한 진리를 통해 다양한 가능성을 찾는 것이고, 귀납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진리를 통찰하는 과정인데, 퍼스는 3가지 항목을 가지고 연역과 귀납을 설명하고 나아가 귀추라는 요상한 개념을 덧붙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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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추란 일종의 직관이다. 퍼스는 귀추=직관을 두가지로 구분한다고 하는데, 첫번째는 앞서 언급한 어떻게와 결과를 통한 귀추다. 선생님은 판단력을 중시하는 철학자 답게 윤리적 예를 들어 설명해 주셨다. 가령 전통적으로 정해진 규범이 확실이 있고, 원하는 도덕적 결과가 있을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귀추다. 과거 사회에서 어른들은 오랜 규범을 기준으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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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선생님이 처음에 무엇과 어떻게 그리고 결과를 행성과 법칙에 비유하는 것이었는데, 선생님은 무엇을 행성의 상태, 어떻게를 행성궤도법칙에 비유하셨다. 행성의 숫자와 위치 등 정확한 행성의 상태를 알고 궤도 법칙을 알면 우리는 미래 행성이 어디에 있는지 계산할 수 있다. 이 계산 과정이 바로 연역이다. 나는 이 설명을 너무 흥미롭게 들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께 찰스 길리스피의 <객관성의 칼날>을 추천하고 있던 터였다. 그 책은 선생님이 비유를 들던 과학의 출현 즉 과학사 책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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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스피는 코페르니쿠스에서 케플러, 갈리레이, 뉴튼에 이르기까지 만유인력의 법칙이 탄생하는 귀납의 과정을 잘 설명하는데, 특히 베이컨의 실험과 관찰에 의한 귀납법의 출현을 중요한 포인트로 삼는다. 나아가 데카르트에 의한 연역의 출현도 과학사에서 중요한 대목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니... 우연치고는 참으로 신기했다. 

토마스 네이글 책을 번역한 조영기 선생님의 후기를 읽으며 나는 철학이 과학에 의해 굴절되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 철학은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는 학문이었다. 사실 과학도 철학의 한 분과에 불과했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한 방법을 공부하는 과정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과학은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특히 방법론에 있어 '실험과 관찰' 그리고 '수학'이 도입되면서 과학적 방법은 기존 철학의 논리학을 뛰어넘는다. 과학이 종교과 철학이 예측하지 못하던 사실들을 예측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거의 정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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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점차 철학에서 독립했고, 철학의 오랜 기반인 존재론적 형이상학은 실험과 관찰에 의해 관측된 물리학에 자리를 내어준다. 신 존재를 논하는 형이상학은 모호했지만 원자를 발견한 물리학은 자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학은 수학을 통해 원자의 운동과 위치까지 예측하고 있었다.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은 신에서 원자로 이동했다. 근대에 들어와 철학은 인식론으로 기우는데 이조차 여의치 않았다. 물론 경험론과 합리론 등 다양한 철학적 관점이 발달했지만 현대에 와서 뇌과학에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결국 전통 철학에서 남은 것은 윤리학 뿐이다. 이성민 선생님에 의하면 아렌트는 늘 전통 철학은 끝났다고 주장하곤 했다는데, 그녀는 유독 가치 판단력에 의한 윤리학을 중요시한다. 어쩌면 그녀는 이런 흐름을 완벽히 읽고 있었던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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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인식론이 과학에 자리를 내어준 가장 큰 원인은 유아론 때문이다. 유아론이란 모든 기준을 자신의 '생각'으로 두는 것인데... 이는 내면의 중시다. 내면을 중시하다 보니 심리학이 발달하고 급기야 정신분석까지 발달하게 된다. 주체성, 자유, 책임 등의 강조도 비슷한 취지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 보니 인식론은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본적 유아론으로 왜곡되고 결국 사회적 양극화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자신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는 '언어'에 천착하게 되는데.... 언어학, 기호학, 분석철학 등이 이런 이유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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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플라톤시대가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오던 시대의 과도기적 상황이라고 보는데 우리시대가 딱 그렇다. 어떤 언어적 변화가 요구되거나 필요한 시기가 온 것이다. 철학이 과학으로 굴절되어 위기가 오고 윤리학이 출현하는 현상도 거의 유사하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나의 저작 <역사는 디자인된다>의 역사연표는 아직 유효하다. 그 연표는 그 시대와 우리 시대를 패턴적으로 닮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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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어, 기호학은 디자인의 출현과도 관련이 깊다. 디자인은 일종의 언어다. 앞서 퍼스의 연역과 귀납, 귀추를 언어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 무엇은 사물들 혹은 연상되는 이미지이다. 어떻게는 그 사물의 이름이거나 단어다. 그리고 결과는 단어에 대한 개념 혹은 관념에 해당된다. 정리하면 '무엇=이미지', '어떻게=단어', '결과=개념'이 된다. 보통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 이름인 단어는 이미지와 매칭이 되는데 이 관계가 다소 복잡해 개념과 관념이 생긴다. 어린 시절에는 보통 사물과 이름이 1:1로 매칭되는데, 약 10살이 되면 단어가 하나의 사물이나 이미지에 매칭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 개념을 갖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보편적인 단어의 개념은 경험이 거듭되면서 성장하게 된다. 그래서 발달심리와 언어에 대한 연구도 상당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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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이 세 항목을 가지고 연역과 귀납과 귀추를 설명하면, '이미지를 알고 이에 해당되는 이름=단어를 알면' 다양한 개념이 도출되는데 이는 '연역'이다. '이미지와 개념'을 알고 단어를 만들면 이는 '귀납'이다. 마지막으로 '단어와 개념'을 알고 이미지를 연상하면 그것이 바로 '귀추'다. 대개의 사람들이 하는 디자인이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가 급변하면서 사람들은 원하는 개념적 결과를 알면서 단어와 이미지를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데 이는 큰 난제(tough-problem)였다. 이때 디자이너들이 출현해 이 난제 해결에 앞장서는데, 특히 치열한 경제 분야에서 그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들은 사람들의 '니즈=개념'을 파악해 상품이라는 '무엇=이미지'와 소비라는 '어떻게=단어'를 능수능란하게 만들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귀추다. 즉 '개념'만 알고 '이미지와 이름'을 모두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서 '이미지와 이름'을 모두 도출해야 하는 문제 해결이 바로 귀추다. 이것이 바로 전문 디자이너들이 늘 해왔던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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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민 선생님은 이런 난제가 사회에서도 생겼다고 하셨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전통적 규범과 도덕이 더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이 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런 난감한 귀추적 상황에서 디자이너들의 역할이 필요해졌다. 이것이 사회혁신, 소셜디자이너들이 등장하는 계기이자, '디자인씽킹'이란 용어가 출현한 이유다. 결국 디자인씽킹이란 디자인적 유추, 즉 결과만 알고 '무엇과 어떻게'를 모르는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알아가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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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그래픽 디자인적으로 설명하면 원하는 생각과 '소통'이 전제된 상황에서 '단어와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이다. 이때 단어가 강조되면 글쓰기요, 이미지가 강조되면 그리기다. 사실 표현방식의 강조만 다를뿐 소통을 목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은 동일하다. 즉 글을 쓰던 포스터를 만들던 똑같은 언어적 행위인 셈이다. 그래서 나는 디자인을 시각언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어제 비로소 내가 왜 디자인을 시각언어라고 주장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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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학>의 저자 무카이 슈타로는 퍼스의 귀추법을 강조한다. 나는 그 책을 읽으며 그저 '직관'이란 단어에 주목했을 뿐 맥락을 알아 챌 수 없었다. 그런데 어제 비로소 철학과 과학 그리고 언어의 흐름, 방법론의 변화, 선생님의 통찰에 힘입어 그 '직관=귀추'를 이해한 것이다. 시각언어로서의 디자인을 이제야 이해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궁금하다. 과연 무카이는 이런 맥락을 알았을까? 그를 가르쳤던 울름의 선생님들은? 나아가 바우하우스의 교사들은 이런 흐름과 맥락을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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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개운치 않다. 눈치채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위 접근은 전형적인 서양적 접근방식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이라는 혹은 '정-반-합'이라는 3항목에 의거한 삼각형 접근이다. 나는 이 접근을 부정하고 4항목에 의거한 원형적 순환을 추구한다. 이는 연역과 귀납, 귀추라는 단어의 개념이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의미다. 문득 떠오른 것은 무엇과 어떻게, 결과에서 '왜'와 '어디로'가 없다는 점이다. 결과가 다소 어디로를 내포하고 있으니 남은 것은 '왜'이다. '왜'라는 항목이 추가되어 '왜-무엇-어떻게-어디로(결과)'인 상황에서 연역과 귀납, 귀추는 어떤 개념을 갖게 될까? 어떤 방법론을 낳을까? 하는 흥미로운 호기심이 생긴다. 나아가 '이미지=무엇', '단어=어떻게', '개념=결과'에 항목이 하나 더 추가된다면 그건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무=열반=공허=모름'일까? 즉 호기심일까. 플라톤이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에 빙의되어 말했던 '에로스' 바로 '사랑'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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