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거짓이다. 진실 따윈 없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행여 나에게 진실이 있다는 그것은 내가 믿고 있고, 내 친구와 주변인들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즉 진실이란 그 순간의 믿음에 불과하다. 우리가 말하는 소위 지성 또한 진실 믿음의 한 단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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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학교 철학 선생님이신 이성민 샘은 아렌트의 말을 빌려 지성과 이성을 구분한다. 진실을 믿지 않으면 어떤 것이 진실인지 고민하게 된다. 이 생각과정이 이성이다. 이성이란 일종의 우유부단 상태... 즉 결정하지 못하는, 판단이 중지된 상태를 말한다. 오래전 서양의 어떤 학파는 이런 상태를 에포케라 말하며 최고의 경지라 여겼고, 근대 철학의 아버지는 이 문제를 마지막으로 골몰했다. 아 그보다 훨씬전 소크라테스는 모름의 자각을 주장했고, 붓다는 참나란 ‘모름’이라 설법했다. 이처럼 역사 속에서 이성적 펙트체크 노력은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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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세상은 가짜뉴스로 넘쳐난다. 그래서 팩트체크 뉴스가 중요해졌다. 나 또한 요즘 어떤 팩트 체크 회사의 브랜딩을 돕고 있다. 이 도움이 저널리즘 문화에 기여할수 있길 바라며. 하지만 사실 난 모든 뉴스는 쇼며 드라마며 가짜 뉴스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팩트체크 뉴스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 진실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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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진실이 없다’는 표현은 좀 가혹하다. ‘진실이 유보된다’라는 정도가 좋을듯 싶다. 유보는 곧 진실여부를 알기 위해 노력하는 판단력, 바로 이성을 부른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때 이 이성을 써야 할까? 바로 악을 만났을 때이다. 여기서 악은 실체적 악마는 아니다. 어떤 해로운 판단이나 폭력을 의미한다. 뉴스나 이론, 이념, 관점에서 악은 선악의 이분법이다. 가령 지성과 이성의 이분법은 악이 아니다. 이 이분법은 사태를 이해하기에 아주 유용하고 유익하다. 반면 남북을 가르고 북은 나쁜놈, 빨갱이로 규정하는 이분법은 나쁘다. 이것은 해로운 판단을 낳고, 폭력을 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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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는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고 썼다. 이번 글은 폭력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말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이성 없음’에서,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에서, 선악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견고한 지성에서 온다. 그것을 경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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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패턴으로 역사를 읽었던 유사 역사디자이너로서 앞으로 수년안에 폭력이 우리 사회를 지배할까 두려워서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수 있는 건 사전에 폭력을 인지하고 그 원인을 알려줌으로써 혹 폭력적 사태가 올 경우 스스로 자제할 수 있도록... 결국 폭력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이성적 판단력에 호소하는 길 뿐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