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적 현실이 독서를 방해하는 적절한 예다. 하지만 이 우연은 필연적으로 내 머리속에서 다양한 해석으로 거듭난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며 '실존주의'를 설명하려고 메모했다. 대략 요약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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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는 신과 분리된 인간, 큰 미래나 희망을 상실한 상태, 아래 발췌된 인용에서 나오듯 역사의 봉우리가 아닌 골짜기를 지나는 집단이나 민족에게 우세한다. 실존은 믿음과 이론적 지혜보다는 그때그때 주어진 우연적 상황에 잘 대처하는 실천적 지혜를 강조한다. 즉 순간순간의 선택이 삶을 좌우한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그것에 대한 통제는 불가능하기에 그냥 어떻해든 살아갈 수밖에 없는 태도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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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철학사조는 20세기 중반 유행했지만 그 기원은 니체와 키에르케고르 더 멀게는 파스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모두 죽음과 불안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낀 나약한 파스칼과 키에르케고르는 신에 의지했지만 20세기에는 신조차 죽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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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은 실존주의 자체가 아니다. "왜 20세기 중반 실존주의가 유행했을까?"이다. 즉 철학은 역사적 맥락과 연동되기에 철학은 역사의 결과다. 그렇기에 우리는 철학의 원인을 역사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실존주의 유행의 원인을 '조국의 불행',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2차 세계대전 탓이라 생각한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몰락한 상황에서 인간에게 믿을건 우연밖에 없었다. 우연은 그들이 죽인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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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사태가 끝났다. 그는 실존적 선택을 했다. 하지만 이 사태를 단순히 실존적 선택이라는 우연으로 보아선 안된다. 지금이 전쟁이후의 절망의 시대도 아니고. 조국이 있든 없든 어쨌듯 인간은 살아간다. 검찰의 개혁은 시작되었다. 문제는 이 개혁운명을 우연에 맡기냐 의지로 밀고 가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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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이냐 필연이냐'는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어린시절 우리는 우연에 즐겨웠다. 나이가들면서 꿈이 생겼고 그 꿈을 쫓는다. 더 나이가 들면 다시 우연에 삶을 맡긴다. 이렇듯 실존주의는 절망적 상황만이 아니라 즐겁고 편안한 상황에서도 나타난다. 문제는 우리가 그걸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냐이다. 20세기 중반의 편협하고 수동적인 일방적 실존이 아닌 다원적이고 능동적인 다양한 실존을 인식해야 올바른 역사적 이해와 철학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