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오래전에 이어령 선생이 한국인은 남의 말을 히어(들리는 대로 듣기만 하는 것)할 뿐, 리슨(귀를 기울여 듣는 것)하지 못하는 나쁜 버릇을 갖고 있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에는 나도 이어령 선생의 주장을 따라서 한국인이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못하는 못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연구하면서, 한국인이 특별히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을 가진 겨레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있는 많은 겨레들 가운데서 어떤 겨레를 꼬집에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을 가진 겨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개인이야 그럴 수 도 있지만, 겨레가 그렇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한국인처럼 우리로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겨레는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인이 정말로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고약한 버릇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우리로서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떻게 오늘날처럼 온갖 일을 척척 해낼 수 있겠는가.
서양인과 한국인은 남의 말을 듣는 태도가 조금 다르다. 서양인은 개인주의라는 바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듣더라도, 그것을 받아주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서양인은 남의 말을 아무리 귀담아 들어주더라도, 그의 뜻을 알아주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귀담아 들어주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한국인은 우리로서 함께 어울려 살아가기 때문에 내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여 들으면, 그것을 우리의 일로서 받아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남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언제나 거리를 두는 척하면서 들음으로써, 남의 뜻을 알아주는 것에 대한 나의 부담을 줄이려고 한다. 내가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척하게 되면, 남이 내가 그것을 들어줄 수 있을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기 쉽다. 이어령 선생이 한국인은 히어만 하고 리슨을 잘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국인의 속내를 깊이 살피지 않은 데서 나온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최봉영, 183-18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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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인용구에서 우리가 대화에 있어 왜 어려움을 겪는지 그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왜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화가 그토록 쉬운지 이유를 찾았다. 나아가 우리가 대화를 대화답게 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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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외국의 것을 잣대로 삼아 한국의 것을 판단해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어떤 시대적 상황이 한몫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외부의 것을 끌여들여 내부의 것을 바꿔야 하는 소명의식이 한몫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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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나는 삼성과 엘지 등의 기업들, BTS와 기생충 그리고 수많은 스포츠와 문화예술인들 등의 활약을 보면서 우리는 더이상 남의 것으로 우리 것의 잣대를 삼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제 남의 것은 충분히 읽었으니 우리 것이 무엇인지 곰곰히 따져볼때가 온 것 같다. 그럴 생각이 있다면 이 책을 첫 시작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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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에서 '우리'까지, 한국말의 바탕적 의미와 변주들을 다룬다. 이 책의 목차를 대강 나열하면 나, 저, 너, 남, 나다, 낳다, 느낌, 알다, 쉬다, 보다, 맛, 멋, 떨림, 울림, 차림, 감 그리고 우리까지이다. '나'에서 '우리'까지 모두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말들이다. 만약 이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 안다면 이 말들로 인해 우리의 생각과 태도가 어떠한지, 한국인이란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대강의 졸가리를 잡을 수 있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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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필기는 나의 창작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