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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여경 Feb 23. 2021

시각언어 2강-1

감각과 지각, 생각의 영역

1. 시각언어란 무엇인가?

앞 강의 요약

한국사람은 크고 참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럼 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커진다는 높다, 깊다, 넓다를 포괄하는 말입니다. 참하다는 '(속이)차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어떤 대상을 겉과 속으로 보고 겉이 크고, 속이 가득 찬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죠.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은 크고 참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 세상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히 높은 것을 말합니다. 높이 올라가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래서 최대한 쉽고 빠르게 높이 올라가려고 합니다. 높이 올라만 가면 삶이 편하고 쉬워질거라 생각하기에 편법과 불법을 서슴치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외롭습니다. 아무래도 높은 곳에는 사람이 별로 없거든요. 게다가 모진 삶을 살았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항상 불안합니다. 떨어질까봐요. 어떻게 올라온 곳인데 죽어도 내려가기 싫죠. 그래서 떨어질 바에 그냥 죽는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죠. 이런데도 사람들은 여전히 높이만을 지향해 공부를 합니다.  

자신을 소중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항상 성장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살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면 오늘보다 내일, 내일보다 모레 나는 더 크고 참한 사람이 되어있을텐데 죽기에 너무 아깝잖아요. 그런데 세상은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이 되기 보다는 높은 사람이 될 것을 강요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강요에 휘둘리지 않고, 또 누군가에게 이런 강요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삼각형이나 네모의 모서리에서 뾰족한 부분 바깥은 '모'라고 말하고, 안쪽은 '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주먹을 앞으로 내는 것은 '지른다'라고 말하죠. 그래서 '모질다'는 '모+지르다'로 뾰족한 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면 아무래도 친구가 별로 없겠죠.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사람처럼요. 반면 안쪽으로 나아가는 '어+지르다'는 어질게 사는 사람입니다. 양팔벌려 상대를 안아주는 사람이죠. 이런 사람은 넓은 곳을 지향하기에 친구가 많습니다. 

사람은 어질게 살아야 합니다. 어질게 산다는 것은 넓이를 크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진 공부는 높이가 아니라 넓이를 지향합니다. 넓은 사람이 되면 외롭지 않습니다. 게다가 떨어질 염려도 없습니다. 또한 높은 사람은 속이 좁아서 채울 공간이 없는 반면 넓은 사람은 채울 것이 많습니다. 넓이를 추구하면 보람이 생깁니다. 이 보람을 바탕으로 위함을 할 수 있죠. 

여기에 넓이에 깊이 까지 깊다면 바탕이 더 단단해 집니다. 깊이를 추구하는 삶은 믿음을 만들어가는 삶입니다. '믿음'의 '믿'은 '밑'을 의미합니다. 믿음은 밑이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죠. 깊은 믿음을 추구하면 다소 외로울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떨어질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깊은 믿음으로 넓고 깊어진 공간을 채워가기 바쁘니까요. 높이를 지향하는 삶은 '위함'과 '목표' '목적'이 있는 삶입니다. 이 높이가 잘 올라가려면 바탕이 튼튼해야 합니다. 그 바탕은 넓이와 깊이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높이 올라가기 위해 반드시 넓이와 깊의 바탕을 잘 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을 탄탄하게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높이 올라가도 외롭지 않고, 불안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하게 크고 참한 사람이죠. 

사람만이 아니라 이론도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디자인이론은 높이만을 지향해왔습니다. 넓이와 깊이는 늘 뒷전이었죠. 그래서 디자인이론은 항상 시류에 흔들렸습니다. 그때그때의 뜬구름을 잡는 상황이랄까요. 높이만 추구있기에 늘 외롭고 불안했죠. 트랜드에 늘 크게 흔들렸습니다. 지난 백여년 수많은 디자인 개념이 스쳐갔을뿐 아직 이렇다할 디자인이론이 없습니다. 즉 디자인의 바탕이 없는 셈이죠. 저는 이런 상황이 늘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디자인이론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십여년동안 넓이와 깊이를 추구했습니다. 먼저 디자인이론을 세울 탄탄한 바탕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그래야 그 위에 여러 디자인이론이 안정되게 설 수 있으니까요. 지금부터 소개할 내용이 그렇습니다. 디자인현상이나 실무에서 바로 쓰이는 이론이라기 보다는 디자인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바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바탕은 깊이가 있어야 하기에 다소 어렵습니다. 그래도 잘 따라오시면 앞으로 디자인을 공부 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삼각형을 좋아했습니다. 심지어 정삼각형으로 신존재증명을 했을 정도죠. 그는 사람도 삼각형으로 상상했던 듯 싶습니다. 정신은 삼각형 위쪽에 있고, 신체는 삼각형 아래쪽에 있다고 여겨죠. '생각이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삼각형 아래쪽인 신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죠. 

데카르트는 신체 감각을 믿지 않았습니다. 감각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바뀌기 때문이었죠. 가령 빨간색 사과가 있습니다. 그럼 감각은 "아 사과는 빨간색이구나"라고 여기겠죠. 날이 어두워지면서 사과의 색깔이 바뀝니다. 빛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럼 감각은 "사과는 빨간색이 아니다"라고 여기겠죠. 날이 밝던 어둡던 우리가 사과가 여전히 빨간색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감각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빛이 바뀌었기에 그렇데 보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데카르트는 오로지 생각만을 믿었습니다

감각은 매번 달라집니다. 매번 달라지는 것을 갖고 언어를 만들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인정하면서 항상 그러한 것을 갖고 언어를 만들어야 합니다. 언어를 만들기 위해서는 경험하는 대상을 분해=해체해서 요목조목 따져봐야 합니다. 그리고 명석하고 판명한 것, 즉 언제나 그러한 것, 바뀌지 않으면서 모두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만약 그것을 찾는다면 그것이 그 대상의 핵심 요소거나 부품이 되겠죠. 다시 조립할때 그것은 절대 잃어버려선 안됩니다. 학문에 있어 데카르트가 생각한 핵심 요소나 부품은 바로 수학입니다. 산술과 기하학은 감각세계가 아닌 생각세계이기에 언제나 명석판명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1+1은 깨어있을때나 잠잘때나 언제나 2이니까요. 그래서 데카르트는 수학이야말로 진정한 신학이라 생각했습니다. 

앞선 강의에서 신경계를 근거로 사람은 "대사-감각-지각-생각"하는 존재라 말했습니다. 이중 데카르트는 생각만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를 이를 의심했죠. 그리고 노동의 가치와 무의식의을 발견했습니다. 존재는 노동에 근거하고, 생각은 무의식에 지배받는다는 사실을 주장했죠. 이를 근거로 '생각=존재'라는 도식을 부정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정했고 이제 이들의 주장은 상식이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데카르트가 생각이라고 여겼던 '말=언어=수학'들은 경험에 근거합니다. 즉 생각은 신이 준 것이 아니라 문명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문명은 인간의 경험으로 축적된 것이죠. 그 경험은 바로 몸의 경험, 즉 신체적 경험들입니다. 사람들은 이 경험을 근거로 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들이 축적되어 생각을 끌어냅니다. 그렇기에 데카르트가 존재라 여겼던 '생각'은 사실 몸=신체에 근거한 것입니다. 경험이 말을 만들고 말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다시 경험을 선택합니다. 이 경험과 말, 생각의 순환은 아주 중요합니다. 크게 양보해 데카르트처럼 인간을 삼각형으로 여기더라도 정신과 신체를 위와 아래로 두어선 안됩니다. 서로 옆으로 두면 어떨까요? 아니 굳이 둘을 나눌 필요가 있을까요? 앞으로 수업이 진행되면서 여기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할 것입니다. 일단은 다시 예술로 돌아가보죠. 


고전미술의 전통 예술가들은 감각을 모방했습니다. 인상파들이 등장해 지각적 재현을 추구합니다. 고흐는 감각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고, 고갱은 인간의 본성을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표현주의 미술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인상파로 분류되지만 세잔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각적 인상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감각되는 대상인 사과나 병을 추상적인 구, 원통, 원뿔 등으로 분석합니다. 이를 고려해 사과나 병, 산을 그렸습니다. 마치 데카르트처럼요. 

마티스와 피카소는 세잔의 접근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감각지각되는 색과 형태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체합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재조립하는 방식으로 표현을 했죠. 이들의 시도는 다시 여러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마티스와 피카소가 세잔보다 더 과감했듯이 다른 예술가들은 마티스나 피카소보다 더 과감하게 대상을 해체합니다. 그 결과 도무지 색과 형태의 의미를 알아보기 힘든 독특한 미술양식이 출현합니다. 이를 추상주의 미술이라고 말합니다. 

20세기 초 추상주의 미술은 러시아 구성주의와 네덜란드 데스틸이 대표적입니다. 구성주의는 형태, 데스틸은 색을 중심으로 대상을 해체합니다. 그리고 이를 다시 조립합니다. 미술에서는 이 조립을 콜라주 혹은 몽타주라고 말합니다. 이런 접근 방식은 미술가들에게 상식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거지?"라는 행위의 의미였습니다. 

변기로 유명한 뒤샹은 기존의 형식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대답합니다. 변기=레디메이드는 기존의 '조각'이라는 예술 형식을 파괴한 것입니다. 무의식의 개념과 뒤샹에 영감을 받은 예술가들은 기존의 '회화' '조각' '건축'으로 대표되는 예술형식을 모두 파괴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형식들로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하죠. 그래서 20세기 현대미술을 형식주의라고 말합니다. 이를 아방가르드 미술이라고 말하는데, '아방가르드'란 프랑스말로 '전위대'를 의미합니다. 아무래도 1~2차 세계대전이 있었던 시대이기에 전쟁은유가 많았던 시절이었죠.  


반면 현대디자인은 현대미술과 다른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현대디자인을 탄생시킨 미술가들은 주로 러시아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미술가들입니다. 구성주의 미술가들과 상당수의 추상주의 미술가들은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미술활동을 생활공예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이를 가르치는 미술학교를 만들었죠. 그런데 이 학교에 프로이트주의 미술가들이 합류합니다. 동시대에 오스트리아 빈에서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유행했습니다. 몇몇 예술가들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표현하는 독특한 표현주의 미술을 추구합니다. 클림트, 코코슈카, 에곤쉴레 등 빈분리파가 불리는 미술가들이 대표적이죠. 이들 중 예술교육에 적용하려는 미술가도 있었습니다. 빈분리파 출신인 아돌프 휠첼은 무의식과 대비를 근거로 빛을 해체해서 색을 표준화합니다. 이 방식을 교육에 적용하죠. 이 교육을 받은 요하네스 이텐과 오스카 슐레머 등이 바우하우스에 합류한 것이죠. 나중에는 네덜란드 데스틸 미술가들도 합류합니다. 이렇듯 바우하우스에 당대 미술가들이 지속적으로 합류하면서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미술 양식을 만들어내죠. 

이렇게 데카르트처럼 해체와 조립=콜라주를 추구하면서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사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우하우스에 모였습니다. 이들은 형태와 색을 추상적으로 분해하고 이를 다시 콜라주하는 방식으로 예술적인 상상력과 창의력을 기르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생활공예의 보편적 양식을 만들어내려 시도합니다. 앞선 제기된 문제 "우리가 왜 이렇게 해야 하는거지?"에 나름의 대답을 한 것이죠. 이것이 바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형성된 배경입니다. 


이렇듯 디자인은 '새로운 예술기법'에 의해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생활양식'을 만들려는 목적을 가진 '새로운 예술 분야'입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예술기법'과 '새로운 시대' 그리고 '새로운 예술'이 무엇인지 좀 더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시간 이를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첫 단계는 '새로운 예술 기법'입니다. 앞서 계속 이야기했던대로 이 기법은 분해, 재조립입니다. 예술적 용어로는 해체와 콜라주 정도로 말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형태와 색, 언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면밀히 살펴볼 예정입니다. 두번째 단계는 새로운 시대의 인간 개념입니다. 앞서 저는 데카르트가 디자인 되는 인간에서 디자인 하는 인간이 되겠다는 선언을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인간의 정의도 달라져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일까? 디자인 하는 인간이란 무엇일까? 인간이 디자인을 한다면 어떤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그 기준이 아름다움이라면 인간은 무엇에서 아름다움을 느낄까? 등등에 대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세번째는 단계는 역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개념의 역사입니다. 예술의 개념이 어떤 식으로 변해 왔는지 살펴보는 시간이죠. 과거에 예술 개념은 어떠했고, 우리 시대에 예술 개념은 어떠한지 이 예술들을 어떤 관점에서 보면 좋은지, 그리고 새로운 예술인 디자인을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이 되겠죠. 지난시간 이야기는 어느정도 요약된듯 싶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보죠. 



(1) 시각과 언어의 짜임새


1) 묻따풀 깨익배

디자인의 바탕은 이미지입니다. 그래픽디자인이든 제품디자인이든 서비스디자인이든 우리는 디자인을 연상할때 포스터나 스마트폰, 앱 등의 경험적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이 경험적 이미지를 디자인에서 소통하는 언어로 여겨 '이미지언어' 혹은 '시각언어'라 부릅니다. 

그럼 "시각언어란 무엇일까요?" 이 수업이 던지는 첫번째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시각언어'하면 어떤 것들이 연상되나요? 뭔가 의미가 있어 보이는 그림? 그럼 문자는요? 문자는 그림인가요 아닌가요? 등등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새로운 질문들이 고구마줄기처럼 따라나옵니다.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묻고 따지는 버릇이 필요합니다. 물론 누군가가 가르쳐주면 좋겠지만 디자인 하는 인간은 그런것에만 기대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묻고 따져서 풀어내고, 깨달아서 익혀 배우는 것이죠. 이를 최봉영 선생님은 묻따풀, 깨익배라고 요약합니다. 묻따풀의 '묻'은 묻는다입니다. 묻는다는 것은 대상을 쪼개어 분류해 무리짓는 것이고, '따'지는 것은 머리를 따듯 하나씩 연결해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문제를 '풀'어내면 됩니다. 깨익배의 '깨'는 깨닫다입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면 기존 생각을 깨서 새롭게 닫는 깨달음이 일어납니다. 이 깨달음을 몸에 익숙하도록 반복해 '익'혀 몸에 배이게 하는 것이 '배'움의 과정이죠. 이 '묻따풀, 깨익배'가 바로 '분해와 조립' 혹은 '해체와 콜라주'입니다.  


감각의 묻따풀을 하려면 형태와 색으로 분해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언어의 묻따풀을 하려면 분해를 해야 합니다. 어떤 단어의 이해하려면 세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먼저 그 단어의 쓰임새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학습'을 공부라고 여깁니다. 그냥 '학습'이란 단어를 통으로 쓰고 있죠. 이것이 쓰임뜻입니다. 쓰임뜻은 맥락에 따라 단어의 쓰임새를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과를 먹었다'라고 말하면 '사과'라는 단어가 무언가 먹는 대상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왕꿍을 먹었다'라고 말하면 '왕꿍'이 뭔지 모르기에 그냥 먹는 것인가보다 짐작합니다. 이렇듯 단어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 단순히 맥락에 따라 쓰임새를 짐작하는 뜻이 바로 쓰임뜻입니다. 

'학습을 했다'에서 맥락에 따라 '학습'의 쓰임뜻을 짐작하면 '공부'이지만, '학'과 '습'의 짜임새를 살피면 짜임뜻이 됩니다. 단어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면 이 단어의 짜임새를 알아야 합니다. 단어를 해체해보는 것이죠. 학습은 '학'과 '습'으로 해체할 수 있습니다. '학'과 '습'은 한자어로 '배울 학學'과 '익힐 습習'입니다. '학습'을 분해해 짜임새를 살핀 짜임뜻은 '배우고 익히다'입니다. 뭔가 좀 더 분명해지는 느낌이 있죠. 그럼 '배우다' '익히다'는 무슨 의미죠? 다시 모호해집니다. 

단어의 쓰임뜻과 짜임뜻을 알았다면 이제 바탕뜻을 알아야 할 차례입니다. 단어의 바탕뜻을 알려면 그 소리가 갖고 있는 어떤 경험과 연결 따져보아야 합니다. 한국말에서 '배우다'는 종에 물이 배이듯 어떤 경험이 몸에 배이는 것입니다. '익히다'는 음식을 익히듯 어떤 경험을 몸에 익히는 것이겠죠. 말은 어떤 경험에 근거해서 만들어졌기에 그 말이 바탕에 어떤 경험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말의 바탕뜻입니다. 배움의 바탕에는 무언가가 배이는 경험, 물이 종이에 배이고, 몸에 아기가 배이고, 습관이 몸에 배이는 느낌이 바로 '배움'입니다. 

다시 '학습'으로 돌아가서 학습의 짜임뜻이 '배우고 익히다'라고 말하는데, 상식적으로 몸에 배인 것이 다시 익혀질 수 있을까요? 음식을 할때 고기에 소스가 배이도록 하려면 먼저 익혀야 하는 것을 아닐까요? 바탕뜻을 따져 물으니 짜임뜻이 뭔가 이상해지죠. 이렇듯 우리말을 해체해서 그 바탕을 살피고 다시 조립하면 말의 의미가 이상하게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가령 '계집'이란 말은 좀 부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말의 짜임은 '계'와 '집'입니다. '계'의 바탕뜻은 무언가가 계속 진행되는 상황입니다. '집'은 짚으로 지붕을 지었다는 의미에서 '짚=집'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계집'은 '계속 집에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바탕뜻에 계집이 여자라는 말은 없습니다. 계속 집에 있는 사람은 남자일수도 있고, 어린아이일수도 있고, 어르신일수도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는 계집이란 말을 마치 '어리석은 여자 아이'로 쓰고 있습니다. 

이렇듯 말의 짜임과 바탕을 알면 뭔가 말의 쓰임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죠. 이렇게 말의 쓰임과 짜임, 바탕을 살피는 것은 사실 누구나 가능합니다. 학자들이 역사나 언어를 연구할때 여러분이 영어를 공부할때 하는 이런 시도를 하죠. 그렇게 해서 역사와 언어를 바로잡고, 암기가 수월해집니다.


그럼 다시 시각언어로 돌아와 "시각언어란 무엇인가"에 대답해보죠. 먼저 '시각언어'의 짜임을 살펴보면 '시각'과 '언어'로 구분됩니다. '시각'은 '시視'와 '각覺'입니다. '시'는 '보인다'는 의미이고, '각'은 '깨닫는'다는 의미이기에 시각의 짜임뜻은 '보아서 깨닫는'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한자어 '본다'는 '눈'을 의미하지만, 지난 시간에 말했듯 한국말에서 본다는 여러 경험에 모두 해당됩니다. '들어본다' '만져본다' '맛본다' '생각해본다' 등등. 그럼 무엇을 본 것일까요? 그것이 형태와 색입니다. 어떤 대상의 바탕은 형태와 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들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시각'인 것이죠. 

그럼 '언어'를 살펴보죠. '언言'은 말씀을 뜻하고, '어語'도 말씀입니다. 말씀은 말을 쌓는다는 의미죠. '언'의 말씀은 우리의 말 전반을 의미합니다. 어에 말씀은 '말씀 언言'에 '나 오吾'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나의 말들을 쌓은 것입니다. 이렇듯 언어란 우리와 나의 말씀들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들은 어떻게 쌓일까요? 말씀들을 모두 기억할 수는 없겠죠.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기록합니다. 그림으로 때론 추상적인 도형으로 심지어 문자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전방위적으로 말씀들을 쌓아왔죠. 그래서 언어를 알려면 기록된 매체들을 살펴야 합니다. 

이제 '시각언어'의 짜임뜻과 바탕뜻을 대강 알았으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지 감이 옵니다. 우리는 시각을 살피기 위해 경험요소들인 형태와 색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언어를 살피기 위해 기록의 수단이 된 매체들, 그림과 문자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이것들을 하나씩 묻고 따지고 풀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각언어' 즉 디자인의 바탕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럼 여러분은 이 깨달음을 근거로 스스로 익히고 배우면 되죠. 자 그럼 하나씩 살펴보죠.

2) 스콧 맥클라우드의 이미지 도식

지금 보시는 그림은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에 나옵니다. 저자는 만화라는 매체를 묻고 따지고 풀었습니다. 그런데 만화의 분석이 마치 그래픽디자인 나아가 시각언어의 분석처럼 읽힙니다. 만화가 글과 그림을 함께 사용해 소통하는 매체이기에 문자와 이미지를 모두 사용하는 그래픽디자인=시각언어와 유사합니다. 서로 연결되고 공유되는 개념들이 있죠. 이 그림이 대표적입니다. 

삼각형은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림을 보면 삼각형 바깥은 감각의 세계와 생각의 세계로 구분되어 있고, 그 중간에 지각과 개념의 인간이 있습니다. 삼각형의 왼쪽 바깥은 감각의 세계입니다. 지각의 세계는 하나의 삼각형으로 묶여있고, 이 삼각형은 두개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하나는 문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왼쪽은 그림삼각형, 오른쪽을 문자삼각형이라 부르겠습니다. 이 문자삼각형 오르쪽 바깥에 생각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그림과 문자를 갖춘 인간을 지각삼각형이라고 놓고 이를 둘러싼 감각과 생각의 세계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각삼각형은 그림과 문자 삼각형으로 구분되어 있죠. 그림의 왼쪽 꼭지점에 reality라고 써 있습니다. 사실적 경험이죠. 이 경험은 감각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눈이 그려져 있죠. 서양사람들에게 '본다'는 'see or look'으로 우리와 달리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감각적으로 보는 행위는 지각적 연상을 유발합니다. 이 연상과정에서 자세한 요소들이 망각되고 중요한 요소들이 부각됩니다. 일종의 캐릭커처를 그리는 것처럼요. 캐릭커처를 그릴때 주름이나 땀구멍이나 콧털 등등 구체적인 요소들은 생략되잖아요. 하지만 눈코입 등 얼굴에서 중요한 요소들은 과장되어 그려지죠. 요즘은 특히 눈을 과장하더라고요. 

이 지각적 연상(재현)이 극단적으로 간 경우가 삼각형의 위쪽 꼭지점이고 오른쪽 꼭지점입니다. 이 지점을 넘으면 문자삼각형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문자도 다소 그림처럼 표현했습니다. 만화는 문자에 어떤 느낌을 더하기 위해 문자를 그림처럼 그리죠. '꽝!'이라는 단어를 그냥 명조나 고딕으로 쓰면 재미가 없으니까요. 뭔가 '꽝!'하는 느낌으로 그리면 좋죠. 디자인에서 이를 (매크로)타이포그래피라고 합니다. 인간은 본래 그림이든 문자든 모두 어떤 이미지로 인식합니다. 이미지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감각전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림은 시각이미지, 문자는 청각이미지라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미각이미지, 후각이미지, 촉각이미지도 있습니다. 

그림의 전체 흐름을 보면, 감각의 세계를 통해 그림으로 구성된 지각의 삼각형이 형성되고 이를 넘으면 그림에서 문자로 바뀌면서 개념삼각형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개념삼각형은 생각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인간=삼각형은 그림과 문자로 구성되어 왼쪽 감각의 세계와 오른쪽 생각의 세계에 둘러쌓여 살아갑니다.

3) 시각경로 : 사실(구상)에서 추상으로 

이 그림에서 지각의 삼각형의 위쪽 꼭지점을 보죠. 여기에는 삼각형과 네모,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습니다. 아래쪽 왼쪽 꼭지점의 사실적 이미지가 감각적인 눈을 따라 올라가 위쪽 꼭지점에 이르면 추상화된 이미지가 되는 그림입니다. 이 변화가 바로 시각경로입니다. 이 경로는 대상을 어떤 의미보다는 느낌으로 보는 상황입니다. 가령 얼굴의 경우 구체적인 얼굴이 점점 삼각형이나 동그라미로 추상화되면서 기존 얼굴 정보들이 생략되죠. 그럼 기존에 갖고 있던 '누구누구가 어떤 표정을 가진' 얼굴의 의미는 사라집니다. 그래도 동그라미하면 얼굴이 연상되기는 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선이 되고 점이 되면 어떻게 될까요? 모든 의미 정보가 완전히 생략되었으니 단순한 감각조차 사라지죠. 사실 '점'은 찍는 순간 면이 되기에 '점'이라는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점은 감각조차 없는 상태죠. 점은 개념으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동그라미에서 점으로 가는 순간 이미 생각의 세계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림에서 보면 위쪽 방향은 문자삼각형 자체가 없습니다. 점으로 넘어가는 순간 감각이 의미가 사라지게 되니까요. 이렇듯 문자삼각형은 감각이 아닌 생각의 세계와 인접합니다.  

사실적 얼굴에서 동그라미라는 추상적 이미지로 가면서 의미가 사라집니다. 선을 넘어 점이 되는 순간 문자의 세계로 들어가죠. 문자로 넘어가기 전 세모와 동그라미, 네모 등의 이미지는 어떤 느낌을 주고 의미를 내포하긴 하는데 정보가 풍부한 사실적 얼굴에 비하면 그 의미는 아주 빈약합니다. 거꾸로 그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반면 사실적 이미지는 그 의미가 구체적이고 분명하기에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어렵죠. 그렇다면 추상화가 진행된다는 것은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용이한 상태로 바뀌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추상의 유용성이 생깁니다. "추상적 이미지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 점이 정말 중요합니다. 일단 이정도로 해두고 다른 경로를 보죠.    

4) 언어경로 : 개별에서 보편 나아가 문자언어로 

사실적 얼굴에서 오른쪽 꼭지점으로 경로를 따라 가면서 얼굴이 단순해집니다. 그런데 위쪽으로 갈때와는 다소 다르죠. 위쪽으로 갈때는 얼굴이 마구 해체되었는데, 오른쪽으로 갈때는 최소한의 얼굴 느낌은 유지됩니다. "마치 이건 얼굴이야"라는 점을 고집하듯이요. 오른쪽 끝에 다다르면 위쪽처럼 추상화된 상황이지만 얼굴이라는 느낌과 의미는 여전합니다. 정말 고집이 센 경로죠. 만약 눈코입을 의미하는 점과 선이 사라지면 동그라미만 남습니다. 그러면 얼굴이라는 의미가 상실되어 버리죠. 그러면 그림삼각형 영역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앞서 동그라미에서 선과 점으로 넘어가는 것처럼요. 

두 경로를 비교하면 위쪽 경로는 구상에서 추상으로 진행되는 추상화 경로입니다. 이 경로는 얼굴이라는 의미에 상관 없이 순수하게 형태를 본다는 느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의미가 아닌 시각적 유사성을 추구합니다. 아래 경로는 개별적 얼굴에서 보편적 얼굴로 진행되는 보편화 경로입니다. 감각적 느낌보다는 얼굴이라는 의미를 고집하며 진행되었습니다. 이 경로는 감각적 유사성보다는 의미적 해석에 기반합니다. 그래서 결과가 다르게 나왔죠. 스콧 맥클라우드는 우리의 지각이 이렇게 두개의 경로로 인식된다는 의미에서 이런 도식을 그렸습니다. 물론 앞선 그림에서처럼 두 경로의 중간에는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들이 존재합니다. 

만화는 사진이 아닙니다. 어쩔수 없이 얼굴을 사진보다 단순하게 그려야 하죠. 수많은 만화 캐릭터들은 어떤 것은 느낌을 강조했고, 어떤 것은 의미를 강조했죠. 최소한의 표현으로 어느 한쪽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느낌과 의미를 모두 살리려는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게 되죠. 때론 극단적인 선택이 더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위쪽 경로는 감각적인 시각 경로입니다. 아래 경로는 의미적인 언어 경로입니다. 감각은 추상화가 용이한데, 언어는 추상화가 맘대로 안됩니다. 왜냐면 사실적 얼굴이 단순해지면서 모든 사람의 얼굴을 의미하게 되거든요. 즉 그림은 단순화되지만 여기에 더 많은 사람의 얼굴이 중첩되는 셈입니다. 가장 단순한 얼굴에 이르면 그 얼굴은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누구의 얼굴도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위쪽 경로가 구상(구체적인 얼굴)에서 추상화된 이미지로 가는 과정이라면, 아래 경로는 개별적인 얼굴에서 보편적인 얼굴로 가는 과정이 됩니다. 종국엔 모두의 얼굴이미지가 남죠. 

이제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말이 익숙하시죠. 추상화된 동그라미와 보편화된 얼굴은 모두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해졌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단순화시키면 이런 유용성이 생깁니다. 둘 모두 맥락에 따라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 의의는 완전히 다릅니다. 추상화된 동그라미는 의미가 제거된 것이고, 보편화된 얼굴은 의미가 중첩된 것이니까요. 이 둘의 차이가 바로 감각적 느낌인 '시각'과 의미적인 '언어'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시각과 달리 언어는 '생각'을 유발합니다. 

이제 문자삼각형을 살펴보죠. 앞선 그림1에서 문자영역의 삼각형을 보시면 위쪽 꼭지점에서 아래 오른쪽으로 꼭지점을 하나 더 만들어 내려가 새로운 삼각형이 만들어집니다. 말씀드렸듯 위쪽의 추상적 도형들이 점이 되는 순간 감각이 상실되니까요. 위쪽 꼭지점은 감각과 생각의 경계에서 지각과 개념을 나누고 있습니다. 아래 왼쪽 꼭지점이 왼쪽으로 연장이 가능하듯, 오른쪽 꼭지점도 계속 연장이 가능해집니다. 그럼 지각과 문자삼각형이 커지겠죠. 우리가 성장한다는 것은 이 삼각형의 크기를 양옆으로 키운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적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떤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그림삼각형 영역은 키우는데 어떤 한계가 있는 반면 문자삼각형 영역은 한계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노력하는 만큼 커지죠.

그림삼각형의 위쪽 꼭지점에서 넘어간 점과 오른쪽 꼭지점에서 넘어간 동그란 원은 사실상 같은 이미지입니다. 여기서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의미없는 추상적 그림을 가지고 문자체계를 만들었거든요. 인간은 수만년전부터 문명을 전수하기 위해 기록해 왔습니다. 그림을 그려 기록하다보니 무언가 불편해졌죠. 그림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그래서 고민합니다. "말 소리를 그대로 기록할 방법이 없을까?" 그러니까 "소리의 유사성과 의미의 해석성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한방에 잡을 방법이 없을까?" 

인간들은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합니다. 최초의 문자인 수메르와 이집트 문자는 아주 단순화된 이미지였습니다. 아래쪽 경로의 단순한 얼굴처럼요.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로 활용합니다. 원리는 단순합니다. 소 모양의 그림은 당시 수메르어나 이집트어로 소를 의미하는 말의 첫발음을 따와서 발음기호로 활용합니다. 이집트 유적에서 마치 글처럼 그림들이 기록된 문서들이 있습니다. 이 문서에서 동그라미로 감싼 부분들이 있죠. 그 부분들은 그림으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읽는 것입니다. 주로 파라오의 이름 혹은 중요한 지명이 그렇습니다. 즉 그림기호로 소리를 기록하는 방식을 개발한 것이죠. 

이를 본 페니키아 사람들은 기발할 아이디어를 발휘해 수천수백개에 달하는 그림기호들을 약 30여개로 축소해 발음기호로 삼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본래 그림의 의미는 사라졌죠. 표음문자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 문자기호를 그리스와 로마에서 도입합니다. 페니키아 상인들은 유라시아 대륙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인도, 티벳, 위그르 등에서도 표음문자를 도입했고, 몽골에서는 아예 제국의 표음문자로 표준문자체계인 파스파문자를 만들었습니다. 몽골의 부마국(몽골 공주가 결혼하는 사위국가)이었던 고려에서는 당연히 파스파문자를 사용했죠. 반면 중국문명은 고립어라는 언어 특성상 상형문자를 굳이 표음문자로 바꿀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복잡한 형태의 한자체계를 유지했죠. 사실 언어가 각기 다른 나라들과 소통하기에 표의문자인 한자가 용이했던 측면도 있고요. 중국문명권에서 한자는 마치 올림픽이나 공항의 픽토그램처럼 만국공통문자였죠.

중국문명권에 속하면서 몽골의 부마국이었던 한국은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를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위대한 세종대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한자와 이두와 파스파, 일본문자 등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를 모두 참고해 '한글'이라는 아주 독특한 표음문자체계를 발명합니다. 이건 엄청난 사건입니다. 사실 한글 덕분에 우리는 20세기 초 제국시대에 식민지를 겪으면서도 민족적, 국가적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한글은 정말 대단한 글자시스템입니다. 감각적인 소리의 유사성과 생각의 기반이 되는 의미의 유사성을 동시에 만족시키거든요. 그 이유는 가장 보편적인 표음문자체계의 알파벳과 달리 세모와 네모, 동그라미 같은 추상적인 이미지, 점과 선 같은 개념적인 이미지를 활용해 만들어진 글자시스템이 때문입니다.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갖고 있기에 가장 많은 소리를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점과 선으로 만들어진 모음체계때문에 그렇습니다. 알파벳의 경우 모음이 별로 없어 소리 기록에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글은 모음(홀소리)이 자음(닿소리)과 별도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기에 다양한 소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전세계의 언어학자들이 모여 지구문자를 채택한다면 알파벳보다 한글이 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림3에서 보듯 문자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추상적인 이미지가 문자로 변합니다. 문자들 조합해 말소리를 그대로 기록해 생각의 세계로 나아감을 알 수 있습니다. 표음문자 체계는 생각의 세계로 나아가기 아주 수월합니다. 알파벳이든 한글이든 누구든 쉽게 문자를 배울 수 있습니다. 얼마나 쉬운지 심지어 4~5세 아이들도 한글과 알파벳을 아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문자들을 조합해 단어를 이해하고 문장을 읽고 씁니다. 기록하기도 너무 쉽고 효율적이죠. 그래서 문자삼각형의 크기를 키우기 아주 용이하죠. 그만큼 생각도 많아지겠죠. 

반면 여전히 그림에 기반한 표의문자인 한자의 경우 배우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한자를 배우려면 최소 500~3000자 정도를 외워야합니다. 저는 3000자 외우는데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다시 3년이 지나니 300자도 기억이 안납니다. 무엇보다 표의문자의 한계는 개념입니다. 문자의 의미 자체가 그려진 이미지에 기반하기에 아무래도 개념의 세계가 다소 제약됩니다. 그래서 요즘 중국은 한자를 간자로 바꾸고 있습니다. 인류문명의 마지막 그림문자(표의문자), 한자가 사라지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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