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ews.joins.com/article/23767580
작년 바우하우스 100주년 심포지엄에서 발표하면서 김정운 샘을 보았다. 발표를 마치고 인사를 하려 했는데 금방 사라져 버렸다. 심포지엄이 시시했는지 아니면 시간이 없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인사할 기회를 놓쳐서 아쉬웠다. 꼭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왜냐면 그날 발표도 그렇고, 지금 구성하는 디자인이론에 있어 김정운 샘의 이 연재가 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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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의 글은 읽기가 어렵다. 한자어와 독일어 같은 동서양 외래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론 사전을 동원해 읽어야 한다. 하지만 읽어낼만한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물론 가끔은 내연관계와 같은 이상한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다. 이런 접근은 이분의 독특한 매력으로 여기면 된다.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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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바우하우스에 대한 내용이지만, 사실 '바우하우스'를 빌미로 현대미술과 현대디자인, 현대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생활양식의 심층을 규명하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는 나와 목적이 일치하기에 더욱 반갑다. 사실 나는 강의와 글쓰기에 있어 이 칼럼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주변에 이 연재를 추천하곤 하는데, 실제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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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피아제와 비고츠키가 나와 반가웠다. 둘은 동갑으로 발달이론을 연구한 선구자이다. 피아제는 스위스, 비고츠키는 소련이다. 둘은 발달에 대한 관점도 정확히 반대다. 비고츠키는 피아제의 연구와 접근 방식에 커다란 존경을 표하지만 결론을 잘못 내렸다고 지적한다. 비고츠키는 35살에 요절했다. 그래서 둘의 논쟁을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나는 피아제보다는 비고츠키의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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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관점 차이는 칼럼에서도 언급된다. 내 언어로 다시 설명하면, 피아제는 자기중심적인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면서 사회성을 획득한다고 말한다. 비고츠키는 사회적으로 상호적인 아이들이 언어를 배우면서 자기 중심성을 획득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피아제가 아니라 비고츠키의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아이는 확실히 사회적이다. 자기 중심성이 없는 사회성이라고 할까. '개는 훌륭하다'에 나오는 강아지와 유사한 상태다. 아이는 늘 주변을 의식하고 의지한다. 사회성이 없으면 아이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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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고츠키의 <생각과 말>을 통해 생각이 어떻게 말로 연결되는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레이코프와 존슨 그리고 최봉영 샘은 경험과 말의 밀접한 관계를 증명해 주셨다. 나는 이를 다시 아이에 적용해 아이가 말을 배우면서 어떤 자아(자기 중심성)을 획득하는지 관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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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수동적으로 말을 배우지만은 않는다. 아이는 늘 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놀이로 여기며 나에게 강요한다. 이 강요가 실패하면 새로운 말을 만든다. 아이는 자신의 경험과 말의 연관짓기를 통해 새로운 생각을 새로운 말과 연관지으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든다. 다시 이를 상호적으로 소통하려 한다. 공공성을 획득하려는 노력이다. 요즘 "아빠 저랑 놀아요!"라는 하루에도 100번이상 듣는데, 너무 힘들지만 아이의 청을 매정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 놀이가 아이의 '말차림' 과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말차림이 아이의 생각과 태도를 만들것이며, '말+생각+태도'가 이 아이의 자아(자기중심성)이 형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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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은 현대 사회의 언어가 생성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작년 최범 샘은 바우하우스를 '성인유치원'이라 규정했다. 이는 정확한 지적이다. 나는 이를 더 확대해 19~20세기는 과거와 단절한 온 인류가 새로운 말을 깨닫고, 만들고,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차는 다소 있었지만 지금 온 인류는 최초로 한 몸통(문명)으로서의 자아를 획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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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현상이 바로 현대 미술과 현대 디자인의 심층에 숨어 있다. 이 칼럼 연재를 읽으며 이 심층을 김정운 샘과 나는 공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우린 언제 만날 수 있을까. 만날 인연이라면 언젠가는 만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