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주의와 상대주의

by 윤여경

최봉영 샘 7강을 정리해 놓고 보니, 절대주의와 상대주의가 또렷히 보인다. 절대주의는 천상천하유아독존, 일체유심조를 주장하기에 자존감, 자신감을 갖는데 도움이 된다. 이점에서 절대주의는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런데 이 매력을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한쪽으로 기울면 허무주의에 빠지고, 다른 한쪽으로 기울면 우월주의에 빠진다. 중용, 중도를 잘 유지해야만 하는 어려움이 있다.

반면 상대주의는 편리하다. 상대주의는 잣대도 줏대도 없어 보일정도로 유연하다. 이리저리 상황에 따라 기울이면 된다. 이러면 이렇게 하고, 저러면 저렇게 하니 살아가는데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여러사람이 함께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상대주의는 항상 열려 있으니까. 그래서 변화에 대응하기에 아주 좋다.


절대주의가 정답을 추구한다면, 상대주의는 적절함을 추구한다. 그래서 상대주의도 적절함을 위한 잣대가 있다. 바로 '말'이다. 한국말은 확실히 상대주의적이다. 그래서 한국사람들은 끊임없이 상대적인 태도를 갖는다. 이편 저편을 나눠 죽일듯 싸우지만 실상 서로 죽이는 일은 거의 없다. 반면 서양사람들은 그냥 죽인다. 스파르타인들은 최대한 말을 적게 하고 그냥 죽이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서양사람들과 한국사람들이 전쟁과 전투에서 죽인 사람의 숫자를 비교하면 정말 엄청날 것이다.

한국사람들이 편을 갈라 말로 티격태격 할때는 때론 일부러 둘이 저러면서 어울리는 것은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마치 편가르기가 이쪽 저쪽이 함께하려는 방편인것처럼 느껴진다. 한국사람들도 이런 상황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한국사람들은 상대적인 선택지를 좋아한다. 즉 상대성을 통해 주어진 변화에 대응한다. 서로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가니 극단적 충돌을 피하려면 말이 섬세해야만 한다. 그래서 한국말이 이토록 섬세한가 보다.


서양말은 확실히 절대주의적이다. 그래서 서양사람들은 끊임없이 절대적인 태도를 갖는다. 허무와 우월에 빠지지 않으려 조심한다. 그리고 계약, 규범, 표준과 같은 잣대와 줏대를 중요시 여긴다. 자신의 변화에는 유연하나, 외부의 변화는 견디기 어렵다. 잣대와 줏대를 중요시 여기는 절대주의 사람들은 상대주의를 이해하기 어렵다. 상대주의자들은 결론을 내리지 않고 말을 뱅뱅 돌리다가 상황에 맞추어 결론을 내니 절대주의자들은 너무 답답할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서양사람은 "I go"라고 말하는 순간, 말하는 사람이 뭘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있다. "I go to school"이라고 말하면 구체적인 의도도 알 수 있다. 반면 한국사람은 "나는 학교에"라고 말하면 의도가 엿보이지만 아직 모호하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라고 말하면 다소 구체적이지만 아직 모른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이라고 말하면 "도대체 어쩌겠다는 거야?"라며 답답해한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라고 말하면 "어휴 답답해 그래서 뭐 어쩌겠다는 건데?!"라며 짜증을 낸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이미 포기한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여유가 있다.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려고"라고 말할 수도 있고 "나는 학교에 엄마와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가는 것도 싫고 해서 안가려고"라고 말할 수도 있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주 자유롭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미쳐버린다. 이것이 한국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변화에 대처하는 요령이다. 한국말은 말하면서 생각을 계속 바꿀 수 있으니까.


서양사람들이 상대주의를 발견한 것은 물리적 현상을 통해서다. 그들은 상대성을 폄하해 왔는데, 한편으론 은근 상대성을 찬양한다. 현대과학이 찾은 상대성을 말할때보면, 이 사람들이 서양사람들이 맞나 싶다. 그래서 한국사람인 내가 과학책 읽기가 편했나... 하지만 인문학적 상황에서는 태도가 확 바뀐다. 지금생각해보면 말 자체가 절대적이라 어쩔 수 없구나 싶다.


조선이후 기득권은 절대주의적이었다.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다. 물로 그 잣대는 온통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본래부터 함께했던 사람이 아닌 정복자로서 행동했다. 그런 태도는 우리 사회 기득권과 관료,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팽배하다. 아마도 한자어, 서양말을 주로 다루었기에 그런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이런 점에서 오구라 기조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은 참으로 단편적으로 한국을 평했다는 생각이다. 그는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이 아니라 한자어와 서양말을 쓰는 한국사람(?)을 주목했다. 당연하다. 한국사람조차 자신이 쓰는 한국말이 무엇인지 몰랐으니 일본사람이 그걸 알리가 없다.


다석 유영모 샘 책을 읽기 시작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역시 한자가 많다. 이분은 예수와 붓다를 통찰하셨다. 그래서 절대주의적 태도가 절대적이다. 읽는내내 답답함이 느껴진다. 아... 이 두꺼운 책을 어찌 다 읽을까. 나는 영원이 이분에게 인정받기는 힘들듯 싶은데... 계속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된다. 그래도 읽어야겠지.

다석 샘은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다른 번역자들처럼 그 안에 갇히지 않는다. 한자어로 상대방을 누르지 않고, 확실한 한국말로 한자어를 착착 풀어내신다. 당신이 이해한 것은 듣는 이와 함께 이해하기 위함이다. 불교를 번역한 원효, 유교를 번역한 퇴계처럼. 기독교를 번역한 다석 샘은 한국말에 대한 이해가 깊다. 하지만 이 분도 한국말 자체에 대한 이해는 시도하지 않으신듯.


조선시대 이후 한국말 자체에 주목한 사람은 세종과 최봉영 둘 뿐인듯 싶다. 아래는 최봉영 샘이 보내주신 도식이다. 한국사람과 서양사람들이 어떻게 말하는지 잘 정리해 놓으셨으니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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