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뭣고"란 무엇인가
오늘의 첫 주제는 '이뭣고'이다. "이뭣고"는 중국 선불교의 화두, '시심마(是甚麽)'가 한국말로 번역된 것이라는데 한자어의 짜임과 바탕을 살펴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화두는 유독 한국 불교에서 주로 많이 거론된다고 해서 검색해 여러 설명을 읽어보았는데 무슨 뜻인지 모호하다. 어떤 글에는 천진난만한 어린아이가 "이건 뭐야"라고 물어보는 태도라 하는데 적절한 비유는 아는듯 싶다. 이 모호한 말을 하버드 출신 스님이 화두로 삼아 30년 동안 수행하다 최근 승복을 벗었다고 한다. 최봉영 선생님은 이 기사를 읽고 페이스북에 한국말 '이뭣고'가 무엇인지 묻고 따지는 글을 한편 쓰셨다고 한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풀어주셨다.
'이뭣고'는 "이것이 무엇인고"를 빠르게 발음한 것으로, '이+뭣+고'는 곧 "이+무엇+고"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이'와 '무엇', '고'는 불교만이 아니라 한국말에서도 아주 중요한 표현이기에 선생님은 긴 시간을 할애해 하나하나 꼼꼼하게 설명해주셨다. 설명을 읽고나면 이 한마디에 엄청난 내용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먼저 '이'를 살펴보자.
'이'란 무엇인가
'이뭣고'에 대답하기 앞서 우린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이'란 무엇인가? 한국말에서 '이'는 정말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다.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다발말에 '이'가 3번나와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한다. 한국말에서 '이'는 내가 바로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 눈앞에 또렷히 드러난 실체다. 여러분 눈앞에 보이는 이 글이 바로 '이'이다. 시선을 옮겨서 다른 대상을 보라. 그럼 그 대상이 바로 '이'이다. 눈의 초점에 맞추어져 또렷하게 보이는 것의 뒤에는 멀리 흐릿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저'이다. 그리고 눈을 감고 방금 보았던 것을 떠올려보라. 그때 떠오르는 대상이 바로 '그'이다. '그'는 경험과 생각에 의해 기억된 무엇이다. 정리하면 '이'는 '저'와 '그'와 함께 한국사람이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말에서 가장 또렷하게 보이는 실체를 '이것'이라 말하고, 흐릿하게 보이는 실체는 '저것', 기억된 실체를 '그것' 혹은 '고것'이라고 말한다. '이것'도 '저것'도 '그것'도 없으면 '멍때림'이다. '멍하다'는 아무런 실체성을 느끼거나 생각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이때 이곳에 있는 현재적 실체다. 현재라는 것은 과거의 미래의 경계로 우리 밖에 존재하는 실체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이 순간순간은 계속 스쳐 지나가기에 실체를 인식하는 순간은 바로 '과거'가 된다. 그래서 '현재'라는 말은 늘 방금전의 과거에 해당된다. 가령 여러분이 눈앞의 책을 보았다고 하자. 여러분의 눈이 그 책을 보면 반사된 빛이 여러분의 시신경을 통해 후배엽에 전달되어 하나의 상(얼)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상을 여러분의 기억(그것) 안에 있는 '책'이라는 범주로 가져와 '이것은 책이다'라고 여긴다. 이 과정이 일어나는 동안 시간이 흐른다. 물론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책을 본 현재의 순간은 인식하는 동안 과거가 된 것이다.
한국말 '느끼다'는 '늦다'와 바탕을 함께 한다. 내가 칼에 손가락을 베었다는 사실을 느끼는 순간 이미 나는 칼에 손가락을 베인 상태다. '이미'라는 말에서 보듯, '이'는 이미 지나간 과거이다. '느꼈다'는 것은 현재가 과거가 되어 돌이키기엔 늦었기에 '느낌=늦음'은 나의 능동적 의지로 개입할 수 없다. 항상 수동적으로 느껴질 뿐이다. 그래서 '이것'이라고 말할때 우리는 '이것'이라는 현재성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다.
이 논리를 쫓다보면 '자유의지'라는 문제가 달려 나온다. '자유의지'는 현재 내가 하고 싶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방금 지나간 과거라 개입이 불가능하다면 자유의지는 어쩌지? 사람은 분명 자유의지를 갖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은 자유의지가 아니란 말인가? 이 문제는 아주 복잡하다. 여기서 논의하기에는 너무 길어질듯 해서 생략한다.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토마스 네이글의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다. 또 '리벳의 자유의지 실험'을 검색해도 참고가 될 것이다.
논리상 자유의지로 현재에 개입이 불가능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자유의지'를 갖고 행동하고 있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 개입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바로 미래다. 즉 자유의지는 현재에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개입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유의지로 하는 행동은 '미리' 하는 것이다. '미리'하는 것은 멀리 미래를 보고 하는 것이다. 멀리 보려면 머리에 있는 눈과 귀, 코와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서 '멀리'와 '머리'는 바탕을 함께 하는 말이다.
사람은 수동적으로 '이미' 느껴진 것만을 놓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생각해 미래를 '미리' 판단함으로서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를 만들어 낸다. 미래를 향한 자유의지를 갖고 이때 이곳(현재)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즉 자유의지는 '현재의 느낌으로 지각하는 과거 상황'이 아니라 '현재의 의지로 자각하는 미래 상황'에 기여한다. 이 점이 철학자와 과학자가 헷갈리는 지점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자유의지를 갖고 미리 할 수 있는 것과 미리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것'은 비록 이미 인식된 것이지만 자유의지로 미리 개입해서 이때 이곳을 이루어 갈 수 있다. 반면 '저것'은 수동적인 경험을 할 뿐 자유의지로 개입하기 어렵다. 사람은 자유의지로 능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있고, 수동적으로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이 둘을 구분하는 한국말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에게는 개입할 수도 없는 흐릿한 '저것'보다 자신의 자유의지로 개입할 수 있는 또렷한 '이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한국말에 '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낱낱이'는 아주 중요한 표현이다. 이 낱말에도 '이'가 들어가는데 낱낱이는 서로 거리가 떨어져 있는 각자의 상황이다. 가령 두 사람이 낱낱이 있다고 하자. 둘은 서로 거리가 떨어져 있기에 각자의 '이것'이 다르다. 서로 흐릿한 '저것'은 공유할 수 있더라고 또렷한 '이것'을 공유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낱낱이'라는 말은 각자의 '이것' 혹은 각각의 '이'를 존중하는 말이다. 즉 '이'는 현대 사회의 자유와 의지의 기반으로 여겨지는 '주체성'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무엇'이란 무엇인가
집중된 '이'가 물음의 대상이 되면 '무엇'이란 말을 하게 된다. 무엇은 '무+어+ㅅ'으로 '어'의 무리를 묻는 것이다. 쉽게말해 대상을 분류해 무리짓는 것이 바로 '무엇'이다. 무리 짓는다는 것은 갈래를 나누고, 범주를 구분하는 태도다. '이것은 옷이구나'라고 말하면 '이것'을 '옷'이라는 범주로 무리 짓는 것이고, '이것은 바지구나'라고 말하면 '이것'을 옷보다 더 작은 범주로 무리 짓는 것이다. 즉 어떤 대상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갈래를 나누고 범주를 따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무엇'은 '물음' '묻다' '무리' 등과 바탕을 함께하고, '뭇' '무릇'과도 연결된다다. '뭇'과 '무릇'은 '대체로'라는 의미로 분류된 것들을 한꺼번에 싸잡아 말할때 '무릇'이라는 말을 한다.
'이뭣=이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면 '이것'의 '무리'가 어디인지 궁금해진 상태다. 스스로 모름을 인정하고 누군가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묻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했다. 이 말은 구체적으로 "너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라"라는 의미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아는 대로 행동한다고 믿었기에 아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착각하면 그 행동은 늘 실패하기 마련이다. 흐릿하게 아는 것을 또렷하게 안다고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늘 자신이 모른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야 태도를 명확히 하고, 행동을 정확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공자도 항상 '묻기'를 강조했다. 그의 애제자 안연을 칭찬할때도 '묻기(問)'를 강조한다. 공자만이 아니라 중국 고전에는 '묻기를 좋아하기(好問)'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고'란 무엇인가
현대 한국사람들은 '골값'과 '골통'을 '꼴깝' '꼴통'이라 말하며 상대를 폄하하는 말로 쓴다. 이는 '고'의 바탕뜻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고'는 생각이다. 그래서 '고'는 머리 속에 들어있다. 그래서 '골값'은 생각의 값어치이고, '골통'은 생각이 들어있는 통이다. 이렇듯 '고'의 바탕뜻을 알면 생각의 값어치인 골값과 생각을 보관하는 통인 '골통'으로 서로를 폄하한 것이 머쓱해질 것이다.
한국말에서 '고'는 '이'만큼이나 많이 쓰인다. '고'와 바탕을 함께하는 말을 나열하면, '고, 곰, 곰곰히, 고마, 고마움, 고맙다' 등이다. '곰'은 단군신화에 한국사람들의 어머니로 등장한다. 곰은 동굴속에서 겨울잠을 잔다. 그냥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곰곰히 생각한다. 반달곰은 겨울동안 실제로 아기곰을 낳아 기른다. 그래서 신화뿐만 아니라 이미 한국말에서 한국사람과 곰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를 '무엇'이라고 물으면 '고'가 시작된다. '고'는 '고민'에서 처럼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 곰곰히 생각한다는 것은 '이'가 어떤 무리에 속하는지, 즉 어떤 범주에 속하는지 꼼꼼하게 따져보는 것이다. 이때 범주는 머리 속에 있는 본래의 그것(기억)에 기반한다.
'본래의 그것'은 플라톤 개념으로 '이데아(idea)'이고, 아리스토텔레스 개념으로 '형상성'을 말한다. 중세 철학으로 보면 '실재'에 해당되고, 현대 언어학으로 보면 '기본층위 범주'이다. '기본층위 범주'란 자동차, 나무 등의 말처럼 이미지와 말이 즉각적으로 연결되는 언어적 범주이다. 그래서 우리가 '고'를 한다는 것은 감각하는 '이'라는 대상을 어떤 언어적 범주로 무리 짓는 과정이다. 이 '고'를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이'가 참인지 거짓인지 아니면 새로운 무엇인지 따져보는 것이다. 즉 '무엇'이 묻는 것이라면 '고'는 따지는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면 '이'는 내 밖에 이미 존재하는 실체적 대상이라면 '고'는 내 안의 생각에 해당된다. 그리고 '무엇'이 '이'과 '고'를 매개한다.
이렇듯 '이뭣고' 즉 '이것이 무엇인고'는 복잡한 인식과 생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질문이 간단치 않다. 불교는 이 질문을 하나의 화두로 삼았다. 그럼 불교에서는 어떤 의도로 '이뭣고'를 화두로 삼았을까. 내 추측에 불교는 세상에 대한 모든 인식은 '내 안'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다. 특히 경전보다 참선으로 주로 수행하는 선불교의 경우 내 안의 인식 즉 '고'가 아주 중요하다. 이 '고'를 또렷하게 앎으로서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도 그럴 것이 밖에 있는 '이'는 내가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 미리 무언가를 하더라도 '이것'이 '저것'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 내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의 자유의지가 이루고자 하는 일을 제대로 이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불교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서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강조한다. 이 말은 모든 존재는 각자의 마음먹기('고')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고'와 동시에 '이'도 강조하셨다. '이뭣고=이것이 무엇인고'는 이것을 인식하는 나라는 존재의 바탕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즉, '이뭣고'는 "나라는 존재는 어떤 바탕을 갖고 있을까"라는 질문인 셈이다. 내 존재의 바탕을 안다는 것은 내 안의 나만이 아니라 내 밖에 나와 함께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대해 묻고 따진다는 것이다. 불교가 '내 안의 나'에 집중했다면, 최봉영 샘은 '내 안의 나'만이 아니라 '내 밖의 나'도 동등하게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이뭣고'는 안과 밖의 상호성(무엇)을 통해 나의 안밖이 서로 연결되는 것이다.
나와 함께하는 것(존재)들은 현재에 있는 것만이 아니다. 우주의 모든 것, 과거에서 지금까지 형성된 것들, 또 앞으로 형성되어 갈 것들이 '나'라는 존재와 계속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함께하는 것들 사이에서 '나'라는 존재는 어떤 역할과 책임을 갖고 있다. 만약 우리가 나와 함께하는 것들(나의 바탕)에 대해 되도록 많은 것을 묻고 따진다면 그 역할과 책임도 무거워질 것이다. 반대로 나와 함께하는 것들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내 안의 것들만 묻고 따진다면 역할과 책임이 가벼워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이 묻고 따지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불교가 자칫 잘못하면 '덧없음'이라는 함정으로 빠져 내 안에 숨는 것도 이 탓이 아닐까 싶었다.
고마움과 행복
나는 앞서 '고' 이야기가 있었기에 '고마움'은 '고+마음'이 아니냐고 여쭤보았는데 선생님은 '고마움'은 '고마+음'이고, '고맙다'는 '고마+하다'이라고 말씀하셨다. 어찌되었던 '고마움'은 나와 함께하는 것들에 대해 묻고 따져서, 즉 곰곰히 생각해서 갖게 되는 마음이다. 나는 무엇때문에 존재하는지 생각해 보면 가족들, 동료들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떠오르는데 곰곰히 더 생각하면 주변 사람들, 직장, 도시, 공기, 물, 지구, 우주 등등 내가 존재하는데 있어 참으로 많은 것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모든 것들에 대해 고마움을 갖게 된다. 그래서 '고마움'을 안다는 것은 나의 존재 가치를 아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선생님은 우울증은 '고마움'을 잃어버린 마음의 병이 아닐까 하셨다.
퇴계는 한자 '경敬'을 '고마 경'이라 풀었다. '고마'를 단순히 좋아하는 상태를 넘어 존중(尊)하고 공경(敬)하는 상태까지 나아가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나를 존재하게 해준 가장 고마운 대상은 역시 부모님이다. 나를 낳으신 부모님은 최초로 나를 있도록 해 주셨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상당기간 내 곁에서 나를 살려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한국말 '사람'은 '사라다'에서 나온 말이다. '사라다'는 '살리다'라는 의미로 사람이란 '살려서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살림살이'라고 말할때 '살림'은 '살려서'이고, '살이'는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고마운 것은 주로 직접적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들이다. 첫째는 역시 부모님이다. 그리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먹고 살기위한 가축, 농작물 나아가 자연과 지구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을 살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고마운 존재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함께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나 또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행복은 '나를 살리는 힘을 가진 것을 받는 것'이다. 불행은 '받지 못하는 것'이고, 다행은 '많이 받는 것'이다. 여러분이 암과 같은 죽을 병에 결렸다고 하다. 그런데 누군가 신약을 가져와 이걸 먹으면 낳는다고 해서 그걸 먹고 몸이 나으면 얼마나 고맙고 행복할까. 그래서 고마움과 행복은 밀접한 관계이다.
나의 존재를 살려주는 힘을 갖고 있는 다른 존재들에 대해 묻고 곰곰히 따져 고마움을 가지면 행복해진다. 가령 '공기란 무엇인가?'라고 묻고 따지면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 단순히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나를 살려주는 다양한 존재들에 대해 곰곰히 묻고 따질수록 행복은 더해진다. 고마운 존재가 점점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존재마다 고마움과 행복의 잣대가 다르다. 원숭이와 물고기에게 물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원숭이는 공기 속에서 살고, 물고기는 물속에 산다. 공기에 고마움을 느낀 원숭이가 물에 빠진 물고기를 도와준답시고 물고기를 물밖으로 꺼내면 어떻게 될까. 물고기가 원숭이에게 고마워할까? 또한 행복을 지속적으로 누리려면 무엇에 대해 고마워해야 하는지 잘 묻고 따져보아야 한다. 사람에게 마약은 순간적으로 행복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마약은 나를 살리기 보다는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고마운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마약을 주고 것은 행복과 거리가 멀다.
행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내게 고마운 존재, 나를 살리는 힘과 존재에 대해 묻고 따져야 한다. 이를 통해 지금 당장 나를 살려주는 것, 과거에 나를 살려주었던 것, 앞으로 나를 살려줄 것들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감각적 자극을 강조한다. 감각은 개인적인 자극이기에 '나만' 느끼는 행복에 가깝다. 그래서 독립된 개인은 감각적 상품을 소비함으로서 행복을 느낀다. 이 소비를 위해 자본주의는 앞으로 나를 살려준 것들을 파괴하게 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우리 행복의 바탕이었던 물과 공기 등 자연이 파괴된다.
과거에 나를 살려주었고, 앞으로도 나를 살려줄 것들을 곰곰히 생각하면 감각적 자극에서 벗어날 수 있다. '나만' 느끼는 행복이 아니라 '너도나도' 느끼는 행복 나아가 모두가 느끼는 행복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그럼으로서 행의 잣대가 달라진다. 즉 곰곰히=고마움을 통해 행복에 대한 잣대가 달라지게 된다. 이렇듯 고마움은 단순히 '고'하는 '마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미래와 행복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사랑과 love
한국말을 안다는 것은 과거부터 이어져온 한국사람들의 집단지성을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말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외국의 사상과 말이 들어와 한국말을 억압하고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철학과 종교의 새로운 말들은 한국사람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지만 동시에 한국사람의 집단지성을 걷어낸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한국말의 바탕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집단지성이 사라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 대표적인 말이 바로 '사랑'이다.
지금 한국에서 '사랑'을 제일 많이 사용하는 분야가 바로 기독교이다. 한국에 도입된 기독교는 '사랑'이라는 말을 선점했다. 이후 영국말 'love'와 한국말 '사랑'은 같은 의미로 여겨졌다. 그런데 선생님이 보기에 영국말 'love'는 형제자매들의 사랑이라면 한국말 '사랑'은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을 말한다. 수평적인 형제자식의 사랑이 수직적인 부모자식의 사랑을 대체함으로서 본래 한국말 '사랑'의 의미가 많이 상실 되었다.
'사랑'을 주제로 다룬 에히리 프롬의 책 제목은 <사랑의 기술(The Art of Loving)>이다. 선생님은 과거 이 책을 읽으며 왜 프롬은 사랑을 'art'로 여겼을지 궁금했다고 하신다. 그러다 한국말에 눈을 뜨면서 영국말 문자에 그 이유가 있음을 알게 되셨다. art는 지금 예술로 번역되지만 본래 기술이었다. art의 라틴어 어워은 ars이고, 이 말의 그리스어는 techne이다. 이 말들은 모두 '기술'을 의미한다. 기술은 무언가를 이루는 행위다. 그래서 art와 act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영국말 다발말(문장)은 일종의 행위자(agent)인 'I'가 목적하는 상대방(you)에게 love라는 행위를 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능동적 주체와 수동적 객체 관계가 형성된다. 반면, 한국말은 '나'가 '너'와 함께 '사랑'이라는 행위를 풀어간다. 한국말은 능동-수동의 방향성보다는 이쪽과 저쪽의 함께성이 강조되기에 방향성이 모호하다. 영국말은 I와 you가 서로 따로따로 하는 바탕에서 함께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간다면, 한국말은 나와 너가 함께하는 바탕에서 따로따로 나아가는 관계로 나아간다. 그래서 한국말은 '우리'가 늘 강조된다.
한국말 '사랑'은 '살하다'이다. '자랑'이 '잘하다'로 잘하는 것을 자랑하는 것이라면, '사랑'은 살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살하다'는 '사르다'와 바탕을 함께 한다.'사르다'는 '불사르다'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태우다'는 의미다. 태우려면 열이 필요하다. 열로 여러 것들을 함께 태움으로서 하나로 만든다. 한국말은 '녹이다' '태우다'를 불과 물에 모두 쓰여진다. 불로 녹일 수 있고, 물로 녹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불로 태울 수 있고, 커피를 타듯 물로 탈수도 있다. 태우고 녹이면 하나가 된다. '사르다' 역시 태우고 녹여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만약 열이 있다면 사르르 녹고, 살살 녹아 더 빨리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랑'이란 사르르 살라서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사랑은 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하니 사람에 있어 사르는 과정을 살펴보자. 사람은 동물들이 암컷과 수컷으로 구분되듯, 남녀로 구분되어 있다. 진화론에 보면 본래 생명은 암수가 동일한 상태에서 시작되면서 진화하면서 암수의 구분이 유전적으로 생존에 유리했기에 이런 구분이 생긴듯 싶다. 남녀가 결혼하면 하나의 가족을 형성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는 아직 완전히 하나는 아니다. 결혼에서 아이를 낳아야 이 아이를 매개로 비로서 남녀는 완전히 하나가 된다.
아이는 엄마와 아빠서 서로 사랑하는(사르는) 과정에서 하나로 만들어진 소중한 존재다. 앞서 '사람'이 바로 '살려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듯이 부모는 소중한 아이를 살려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한다. 자녀를 살리고 키우며 부모는 많은 희생을 감내한다. 이 희생은 자유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미래를 위해 미리 함으로서 지금 현재를 하나씩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사람에게 가장 강렬한 사랑은 바로 '자식 사랑' 즉 '내리 사랑'이다. 이 사랑은 너무 강력해서 때론 목숨을 내놓기도 한다. 최근 인기있던 '부부의 세계'에서도 주인공 부부가 아무리 다투어도 자식문제에 있어서는 머리를 맡댄다. 자식이 잘못될까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한국부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반면 형제자매의 사랑을 강조한 'love'는 사람을 낳는 사랑보다는 남녀간의 수평적 사랑이 더 강하다. 그래서 에히리 프롬 같은 사람은 사랑에 있어 '정情'보다 '기술=art'를 강조한다. 남녀 사이에 어떤 기술로 접근하느냐에 따라 love의 성공여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때 성공이란 바로 성장이다. 서양사람들은 수평적 사랑을 통해 함께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것을 꿈꾼다. '에로스 신'을 주제로 대화한 플라톤의 책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에로스는 '올라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앎의 사다리'라고 말하는데 앞서 '무엇인고'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무엇인고'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한국사람에게 올라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고마움'이다. 어쩌면 'love'는 '사랑'이 아니라 '고마움'으로 번역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 어짜피 서양사람들에게 사랑은 '앎의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니 곰곰히 생각하는 고마움과 다르지 않다.
사랑과 고마움 그리고 행복
자식이 부모의 내리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곰곰히 생각해 자신의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부모가 어떤 사랑을 주었는지 떠올림으로서 자식은 부모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나서 그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의 점으로 귀결되지만 자식이 부모에게 고마움을 생각하는 것은 양쪽으로 갈라지기에 사랑보다 강렬함이 덜하다. 그래서 고마움을 가지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내 경우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도 부모님의 사랑을 느끼긴 어려웠는데, 요즘 자식을 하나 나아 키우면서 역설적으로 부모님의 고마움을 알게 된다. 내가 이 아이를 사랑했듯, 부모님도 나를 사랑하셨겠구나... 아이에 대한 사랑이 강렬해질수록 더불어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도 강렬해진다. 앞서 행복과 고마움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말했듯 한국사람에게 사랑과 고마움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행복과 고마움, 사랑은 사실상 하나로 통한다.
사람은 살려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나를 살려주는 것들에 대해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 위 그림에서 보듯 한국말의 '사랑'은 내려가는 것이다.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과거세대에서 미래세대로 내려가는 내리 사랑이다. 그래서 사랑은 미리미리 먼저 해야 한다. 반면 고마움은 과거로 거슬로 올라가는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렵다. 그래서 노력해야 한다. "이뭣고"를 통해 곰곰히 묻고 따져 그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 앞선 존재의 바탕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앞으로 이어질 아래의 존재에 대해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 위아래 서로 사랑과 고마움을 느끼면 살아갈 힘을 주고 받게 되어 행복해진다. 이 행복으로 위아래와 나는 하나가 된다.
한국사람은 큰사람을 좋아한다. 큰사람이란 먼 과거까지 고마워하고, 먼 미래까지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 부모만이 아니라 조상들 이땅의 문명을 이룬 사람들 나아가 수십억년 유전자를 공유해 왔던 이 땅의 모든 존재에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이다. 동시에 내 삶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먼 미래의 세대와 자연의 존재들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럼으로서 과거의 존재들과 지금 이 순간의 나 그리고 미래의 존재들이 모두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다.
큰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 자기바탕이 튼튼해야 한다. 그래서 한국사람은 한국말에 대한 이해가 절실하다. '이뭣고' 풀이에서 보았듯 한국말은 한국사람의 바탕이다. 자기 바탕이 없으며 아무리 많은 것을 알아도 금방 망각된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붇는 상황이랄까. 이래서는 큰사람으로 거듭나기 어렵다. 밑=아래를 단단하게 하고 여러 나라의 말과 생각들을 담아 나의 것으로 녹여내야 한다. 그래야 한국사람의 말과 생각, 고마움, 사랑, 행복이 지속되고 풍성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