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평화와 말
수업이 시작되기전 선생님과 저녁 먹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은 평화와 말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선생님은 평화라는 말의 모호성을 지적하셨다.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평화에서 '누구'의 문제는 상당히 중요하다. 오로지 저만 혹은 저들끼리만 평화롭다면 그것을 과연 평화라 말할 수 있을까? 지난 수천년간 인류의 평화는 특정계층과 계급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이런 평화는 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강자와 약자, 승패를 나누는 온갖 전쟁과 경쟁은 남들과 것들을 배제한 오로지 저와 저들끼리의 평화를 추구한다.
평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말보단 주로 글을 공유한다. 글을 읽고 쓸줄 아는 사람들은 주로 평화를 선동하고 오로지 말만 하는 사람들은 늘 평화의 희생양이 되곤 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민중'이라고 말하는데, 한국사람들은 '民'을 백성으로 풀었다. 요즘 나는 한국말을 공부하면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이 많아진다. 글을 아는 지배층과 글을 모르는 피지배층 중 누가 더 세상을 잘 알 수 있을까?
터무니없는 질문같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나는 문자라는 매체가 말을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먼저 문자로 기록을 하려면 표준화된 말이 있어야 한다. 이 표준화 과정에서 다양한 말소리가 하나로 통일되면서 말이 억압된다. 표준화된 말은 다시 문자로 기록되면서 소리의 성질이 사라진다.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데, 시각매체인 문자는 그것을 하나로 퉁친다. 이렇게 섬세하고 다양한 말이 표준화된 말, 소리없는 문자로 기록되면서 의미와 해석의 개별성은 사라지고 보편성이 높아진다. 이는 디자인을 할때 의미요소를 단순하게 만들어 보편성을 높히는 행위와 유사하다.
글을 아는 사람은 어떤 말의 바탕을 물어볼 때 늘 글자를 떠올린다. "받침이 무엇이냐, 논리에 맞느냐" 등등 늘 문자를 기준으로 말의 의미를 찾는다. 그럼 글을 모르면 어떨까? 바로 그 틈에 말의 다양성이 채워진다. 우리 집 아이는 6살로 이제 제법 말을 잘한다. 이 아이는 요즘 글자를 읽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글보단 말에 더 익숙하다. 아이와 놀때마다 종종 아이의 말 발달 과정을 관찰하는데, 아이는 놀이를 통해 끊임없이 말을 만들어낸다. 어떤 말은 같이 노는 사람과 공유되어 공공성을 갖추게 된다. 그러면 그 말은 꽤 오래간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 놀이가 끝나면 사라진다. 가령 괴물이름 중 '곱사라'와 '호랑사'가 있는데, '곱사라'는 즉흥적으로 나온 말이라 놀이가 끝나면, 아니 놀이 중간중간에도 금방 까먹는다. 자신이 만들 말인데 "아빠 아까 제가 뭐라고 했죠?"라고 종종 물어볼 정도다. 반면 '호랑이+사자'를 의미하는 '호랑사'는 몇달째 지속되어서 '날치상어'와 함께 가장 무서운 괴물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물론 '호랑사'와 '날치상어'는 상상속의 괴물이다. 아이는 심지어 호랑이와 사자, 날치, 상어 등을 경험해 본 적도 없다. 오로지 이미지가 연상되는 말을 갖고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의 말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미지가 연상되지 않는 '곱사라'는 자꾸 잊어먹는다.
만약 '곱사라'가 기록되어 있다면 어떨까? 이 괴물이름은 이미지 바탕이 없다. 오로지 소리만으로 만들어진 말이다. 그럼에도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면 사람들은 무언가 의미가 있고,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사실 순간적으로 그냥 튀어나온 소리=말인데, 문자로 '곱사라'를 읽는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기에 신비한 괴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런 사람은 이 곱사라에 미쳐 신으로 모실지도 모른다.
나는 이게 문자의 힘이 아닐까 싶다. 문자는 기록되었다는 것, 그 자체로 어떤 힘을 갇는다. 사람들은 이 문자를 믿는 경향이 아주 강하다. 이를 반증하는 사례를 읽은 적이 있다. 과거 어떤 사람이 논문 주석에 누군가와 대화했던 내용을 적었다. 심사위원이 이 주석은 증명할 수 없기에 허용할 수 없다고 하자, 저자는 그 대화 내용을 증언해줄 사람들이 있다며 반발했다. 그러자 심사위원은 내가 당신의 논문 통과를 증언할테니 졸업장은 줄 수 없다고 대응한다. 문서로 보증을 못한다고 하자, 저자는 바로 꼬리를 내리고 근거 문서를 찾아 주석을 고치겠다고 말한다.
말보다 글을 선호하는 예를 또 하나 들면, 누군가가 돈을 빌려달라고 청한다고 해보자. 내가 그 사람을 잘 알고 있는 경우에는 묻고 따지지 않고, 덜컥 돈을 빌려준다. 하지만 처음보는 사람이 빌려달라고 청하면 무엇을 믿고 빌려준단 말인가. 그래서 '차용증=글'을 요구한다. 그 이유는 우리 사회가 말은 믿지 않지만, 글은 믿기 때문이다. 만약 법정으로 가게 되면 말로 한 약속은 증거가 되지 않지만, 글로 쓴 차용증은 증거가 될 것이다. '믿음'은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사람은 말을 믿기에 소통이 가능하다. 나아가 이 말을 글로 쓰면 더 믿는다. 우리 사회는 같은 말이라도 말로만 떠드는 사람보다 글로 쓰는 사람에 대한 신뢰가 높은 편이다. 책과 논문을 쓰지 않고 말로만 과학을 하는 과학자는 사람들이 별로 신뢰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과학자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가 '논문 인용 횟수'이다.
우리가 공부를 할때 주로 '책'을 본다. 사람들은 책에 어떤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 말은 말해지는 순간 증발되지만 글을 오래오래 기록되기에 글의 진리는 말의 진리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래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존중받는 반면 말이 많은 사람은 폄하된다. 그래서 말없이 글을 읽고쓰는 사람은 존경받는다. 그럼 책을 많이 읽으면 세상의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 나는 말차림을 공부하면서 이 믿음이 와장창 무너졌다.
말은 태도 및 행동과 밀접하다. 말이 섬세하면 태도와 행동도 섬세하다. 말을 대충하면 문제가 일어나지만 말을 제대로 잘하면 문제가 해결된다. 말을 잘하는 사람은 문제해결 능력도 탁월하다. 현대 사회에서 변호사와 정치인은 주로 말을 잘하는 사람들로 이 사람들이 사회지도층이 된다. 하지만 글은 말처럼 섬세하지 못하다. 당연히 글로 하는 생각은 한계가 있다. 그래서 오로지 글로 생각하고 글만을 믿는 사람은 태도가 모호하고 행동도 꿈뜨다. 물론 이를 '신중함'이라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신중함이 흐릿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나는 글에 익숙한 사람이다. 오랜시간 읽고쓰고를 반복해왔다. 하지만 주변사람들에게 종종 이런말을 하곤 했다. "책 읽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고백하건데 책으로 나의 윤리관과 도덕성이 나아지지 않았다. 지혜와 통찰도 다른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잘난척 할 수 있는 '지식'이 좀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지식은 대부분 실제 문제에 별반 도움이 안된다. 지난 십여년 내가 누군가에게 기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책에서 얻은 지식이나 지혜는 별로 없고, 대부분 경험으로 얻는 그래픽디자인 능력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말'로 공부할 것인가, '글'로 공부할 것인가. '말'로 공부한다는 것은 세상을 경험하고 사람들과 대화하고 어울리며 공부하는 것이고, '글'로 공부한다는 것은 책과 씨름하며 고독한 사유를 통해 공부하는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주로 후자의 상황에서 공부를 해왔다. 그런데 최근 최봉영 샘을 만나서 책과 고독에 대한 믿음이 깨져버렸다. 선생님은 책에서 신봉하는 4대 성인들 또한 책으로 지혜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며 오로지 글과 책만이 공부의 길이란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하셨다.이 고민은 '믿음'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말'을 믿을 것인가, '글(책)'을 믿을 것인가. 반갑게도 오늘의 주제도 '믿음'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누군가 천국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과연 몇명이나 이 말을 믿을까? 지하철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이 세상에 과연 종교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들은 이 사람의 외침은 믿지 않지만 지하철이 나를 목적지에 안전하게 데려다 줄 것이란 사실은 철떡같이 믿는다.
사람들은 '믿음'하면 종교를 떠올린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믿음은 종교라기 보다는 과학이다. 내일 기후가 알고 싶다면 어디에 문의를 할까. 명동성당? 기상청? 당연히 기상청이다. 사람들은 태연하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철로 이동하고,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찾는다. 모두 과학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대의 진정한 종교는 전통종교인 기독교나 불교가 아닌 신흥종교인 '과학'이라 말하곤 한다.
선생님은 두가지 다발말(문장)을 제시하셨다. 두 다발말은 믿음의 형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첫번째 다발말1에 대한 믿음은 직접 경험보다는 권위있는 누군가의 말씀과 글을 따라 믿는 것이다. 목성과 토성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지구 밖 세계이다. 그래서 경험적으로 목성과 토성의 관계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 다발말을 의심하지 않는 이유는 과학자들이 증명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천체망원경으로 사진을 찍고, 수학적으로 증명해 토성이 목성보다 멀리 있다고 자신있게 말한다. 우리는 과학자들의 사진과 논문, 수식을 읽고 과연 그렇다고 믿는다.
반면 두번째 다발말2에 대한 믿음은 직접 경험이 가능한 믿음이다. 앞선 강의에서 한국말 논리구조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실체적 존재를 가르키는 말이고, '분필'은 내 머리속에 있는 관념적 개념이다. 누군가 "이것은 분필이다"라고 말할때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도 이 둘을 '이다'로 대응된다면 이 다발말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직접 경험에 의해 이 말의 사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즉 다발말2의 믿음은 내가 보고 느껴서 믿는 것이다.
다발말1은 과학자의 말씀을 일방적으로 따라 믿는 것이라면 다발말2는 서로 상호적으로 반증하는 믿음이다.(과학적 사실도 과학자들이 서로서로 논문을 검증해 반증되어야만 믿을 수 있게 된다.) 다발말2의 믿음이 가능한 이유는 두 사람의 생각의 바탕에 '분필'이라는 공통의 관념이 말차림으로 있기 때문이다. '분필'이라는 공공의 말이 두 사람의 밑바탕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분필이다"라는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의 '믿'은 '밑'이다. 우리가 '밑(本)도 끝(末)도 없다'는 말을 할때 '밑'은 밑바탕 즉 '믿음의 바탕'을 의미한다. 누군가 어떤 말을 믿는 것은 이미 그 말의 실질적인 밑바탕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이 소통되는 것은 그 말의 실질적인 밑바탕이 앎으로 공유되어 말차림으로 갖추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앎(알음)'와 '밑(믿음)'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다발말1의 경우는 '앎'보다 '밑'이 먼저인 경우다. 사람들은 과학자들의 권위를 믿기에 그들이 말하는 것을 의심없이 '앎'으로 가져온다. 반면 다발말2의 경우는 '밑'보다 '앎'이 먼저다. 내가 직접 경험해서 알아내야만 그 말을 믿는다. 전자가 '그냥' 믿는 것이라면, 후자는 스스로 '묻고 따져서' 알아야만 믿는 것이다.
사람은 느끼고, 알고, 바라고, 이루는 것은 말로 담아낸다. 이 말을 믿기에 소통이 가능하다. 말은 일종의 '앎(알음)'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을 묻고 따져서 '앎=말'으로 만든다음 '바람'을 담는다. 예를 들면 "아빠 슈퍼윙스 사주세요!"라는 말은 아이가 슈퍼윙스 영상을 보고 여긴 '앎'을 '말'로서 바라는 것이다. 이 바람 덕분에 아이는 자신이 슈퍼윙스를 좋아한다고 믿는다. 이 믿음을 바탕으로 아빠가 슈퍼윙스 사주기를 이루기 위해 떼를 쓴다. 아빠는 이 아이의 '좋음=믿음'을 파악하고 아이가 진짜 슈퍼윙스를 좋아한다고 믿어 장난감을 사준다. 그러면 아이의 바램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영어 Believe(믿음)의 말 바탕이 '좋음'과 연결되어 있다.
한국말의 '믿음'은 '밑음'이다. 우리가 딛고 있는 '밑바닥'과 '밑바탕'이 '믿음'과 바탕을 함께 한다. 그래서 한국말 '믿음'은 영국말 'Believe'보다 훨씬 또렷하게 묻고 따질 수 있다. 바로 위에 그려진 도식이 한국말 믿음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앞서 아이가 아빠를 조르는 과정과 유사하다. 먼저 사람은 경험을 통해 느낌(늧)을 갖게 된다. 이 느낌 정보들은 머리의 중추신경계에서 하나의 이미지로 얼이게 되는데 이를 한국말로 '얼'이라고 말한다. '얼=이미지'가 얼리는 과정은 얼음이 어는 과정과 유사하다. 이렇게 형성된 이미지를 '얼이'라고 말한다. 이 '얼이'는 다시 기억정보와 합쳐저 여김의 단계로 나아간다. 사람은 이 여김을 통해 '넋'이 만들어진다. '얼추', '얼치기'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얼은 설익은 얼음처럼 대강의 이미지가 있는 상태라면 넋은 그 이미지를 기억속 어떤 범주로 여겨 좀 더 또렷하게 이해한 상태다. 이 여김은 일종의 방향성을 갖게 된다. 그래서 여김의 '넋'과 동녘, 서녘의 '녘'은 바탕을 함께 하는 말이다.
이 여김은 두개의 알음(앎)으로 나아간다. 그냥 어림짐작해 직관적으로 알게 된 '앎'이 있고, 꼼꼼하게 묻고 따져서 알게 된 '앎'이 있다. 권위자의 말씀을 그냥 믿는 경우가 직관적 앎에 해당되고, 스스로 묻고 따져서 믿는 경우가 아래쪽으로 향하는 앎에 해당된다. 스스로 묻고 따져서 알게 된 앎은 '알이'이다. 이 '알이'는 다시 '그냥 바래는 것'과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바래는 것' 두 방향으로 갈라진다. 그냥 바라는 것은 그냥 그저 바라는 상태이고, 이루고자 바라는 것은 의지를 갖고 하는 행동을 유발한다. 이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바탕을 찾아야 한다. 앞서 아이가 '좋아한다고 주장'했던 것 처럼 내가 이루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어야만 의지가 생겨 자신있게 행동 할 수 있다. 만약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 없다면 이루고자 하는 태도가 흐릿하고 행동도 꿈틀 것이다. 자기 스스로 '알이'와 '바람'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신의 '알이'와 '바람'이 믿음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이 믿음에 갇혀 더이상 의심하지 않고, 묻고 따지지 않아야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빠가 아이에게 "너 진짜 슈퍼윙스 좋아하는 거 맞아? 옥토넛이 더 좋은 거 아냐?"라고 질문할때 아이가 주저한다면 아빠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사주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면접을 볼때 면접심사관이 어떤 질문을 할때 믿음과 확신을 갖고 자신의 주장을 하는 사람을 더 선호한다. 이는 영업할때도 마찬가지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 확신을 갖고 추천하면 사는 사람은 그 확신을 믿기 마련이다. 하지만 요즘은 사기치는 사람이 하두 많아서 파는 사람의 확신을 믿기 어려울 때가 많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직접 발품을 팔아야 한다. 인터넷을 뒤지고, 매장에 방문에 이것저것 직접 경험하고 묻고 따져야 상대방의 믿음=확신에 갇히지 않는다. 그래서 위 도식에서 '일=이룸'에 갇히지 않기 위해 '늧=느낌'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표현했다.
이 도식을 보면 믿음에 있어 중요한 것은 '알이'이다. 믿음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는 '얼이'가 중요하다. '얼이'는 느낌(감각)으로 얻어진(지각된) 수많은 이미지들이고, '알이'는 기억이미지와 합쳐져 여겨진 것을 묻고 따진 것이다. 나름대로 이해된 정보라고 할까. 이 알이들이 설겨서 바람을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사람은 이 '얼=얼이'와 '알=알이'를 바탕삼아 우리는 어떤 것을 바라고 믿고 이루어 가는 것이다.
'알이'를 믿어 이루는 것
현대인은 '앎=알이'에 대한 태도가 부실하기에 '믿음'에 대한 태도도 부실하다. 누군가를 확실하게 믿지도 않고, 확신을 갖고 무언가를 하지 못한다. 타인도 자신도 믿지 못하니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그래서 자존감이 낮고, 자신감이 떨어져서 늘 불안해 한다. 이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대상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하다 보면 그 대상에 빠져 갇히게 된다. 본래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대상에 몰두해 무언가를 이루어가는데, 확고한 믿음이 없이 집착하니 이루는 것도 없다. 그냥 그렇게 그런대로 대충 살아가게 되어 결국 또 불안에 사로잡혀 갇힌다.
이 불안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다. 앞서 도식에서 제시한 '앎=알이'를 추구하는 것이다. 앎은 추구하는 것은 두가지가 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말이 있고, 글이 있다. 말로 '알이'를 추구하려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경험하며 대화하면 된다. 글로 '알이'를 추구하려면 책을 읽으면 된다. 이렇게 말과 글로 '알이'를 추구하다 보면 스스로 묻고 따지는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때 말만 해서도 안되고, 글만 읽어서도 안된다. 도식에서 보듯 말만 해서는 '그냥 알이'로 나아가 고집스럽게 되고, 글을 읽어서는 '그냥 바람'으로 나아가 이룸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이렇게 하나만 추구하면 나의 밖이나 안에 다시 집착하고 갇히게 되어 불안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
불안에서 벗어나라면 반드시 말과 글을 함께 병행해야 한다. 말과 글로 '알이'를 추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바라는게 생겨 이룸을 얻게 된다. 그러면 불안이 줄어든다. 이룸이 축적될수록 자신감이 생기고, 자존감이 높아서 불안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높아진다. 도식에서 보듯 바람과 이룸 사이에는 '믿음' 있다. 사람은 무언가를 이루어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믿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종교는 이런 점에서 존재적 의미와 가치가 있다. 종교는 믿음을 바탕에 두기에 바라고 이루기 위한 '강력한 힘'을 갖는다. 병도 고치고, 세상도 바꾸고, 경험하지 못한 것도 믿도록 만든다. 하지만 종교에만 빠져 그 믿음에 갇히게 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 자신이 믿는 전지전능한 신만이 진리=진실이라고 생각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바람과 이룸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책임감이 없어지고 나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희생조차 서슴없이 요구하게 된다.
이번 코로나19로 목격하게 된 '신천지'가 대표적인 경우다. 신천지 사람들은 저만 혹은 저들끼리만 구원받기 위해 세상을 배척해 왔다. 교주와 몇몇 리더를 위해 서로가 서로의 희생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과 가족들, 친구들 나아가 관련 없는 주변사람들까지 피해를 주게 되었다. 나는 뉴스나 시사다큐를 보면서 신천지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 대부분이 권위자의 말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묻고 따졌기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새로운 '알음'을 통해 자신이 '믿음'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교단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아직 이들이 신천지를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 또한 아직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안타까워 그들에게 호소를 하고 있다.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과 빠져나온 사람들 모두 여전히 신천지 안과 밖에 머물며 신천지 주변에 갇혀 있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알고 믿어야 할까?"
근대에 들어와 종교가 사람들의 믿음을 배반하자 사람들은 스스로 묻고 따져, 즉 생각하기를 통해 새로운 믿음을 찾았다. 이 생각하기가 바로 '이성'이다. 이성의 만들어낸 생각이 바로 '이념'이다. 이념은 일종의 앎(알이)이다. 종교가 사라진 자리에 '이념=알이'가 들어섰다. '이성=생각하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말미암아(=자유) 알이를 얻는 것이란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어떤 심리학자는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책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지적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묻고 따지기 보다는 다시 새로운 믿음의 대상을 찾기 마련이다. 결국 사람들은 특정 몇몇의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이념을 믿기 시작했다.
이성적 이념에 있어 중요한 것은 방법론이다. 경험을 통해 알아내냐, 생각을 통해 묻고 따져서 알아내냐. 위 도식에서는 모두 필요하지만 사람들은 둘 중에 어떤 것이 우선이냐를 놓고 논쟁했다. 그러다보니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다른 한쪽을 포기하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이 논쟁들은 다시 새로운 이념들을 낳았다. 이 이념들은 뒤에 '~주의'라는 말이 붙는다. '자유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등 새로운 이념들이 속속 등장하자 사람들은 이념 주변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스스로 묻고따져 이념을 선택했다기 보다는 그냥 종교처럼 믿음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둘 또는 셋으로 갈라져 경쟁하고 다투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또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래서 또 다시 물어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믿어야 할까?"
최봉영 선생님 제시한 앎은 '우주'이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우주는 빅뱅에 의해 만들어진 물질적 우주가 아니다. 빅뱅은 최초의 '점'이 있었기에 안밖의 개념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허블망원경으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빅뱅개념이 나왔다. 수백년 뒤에 우주가 축소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이 개념은 바탕을 잃게 된다. 선생님이 말하는 우주는 모든 것이 함께하고 있는 개념적 우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함께성'이다.이 우주는 낱낱의 모든 것이 함께하고 있기에 안밖의 개념이 없다. 그냥 함께하고 있는 것 자체가 우주다. 안밖을 갖고 있는 것은 우주에 있는 '알'들이다. 각각의 알은 '안과 밖'의 개념이 있다.
우주에서 함께하는 존재들 중 사람은 이 안과 밖을 인식한다. 그런데 이 인식은 말에 따라 달라진다. 서양말과 중국말을 쓰는 사람들은 안과 밖의 관계를 안에서 밖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라 여긴다. 그래서 능동과 수동 개념이 중요하다. 나는 이 능동과 수동 개념이 현재의 젠더 개념과 연관 있다고 보는데, 아직 이 생각은 섬세하게 묻고 따진 것은 아니고 어림짐작에 머물러 있다.
한국말을 쓰는 사람들은 안과 밖의 관계를 '안쪽'과 '밖쪽(바깥쪽)'이 함께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능동과 수동 개념이 다소 모호하다. 한국사람들은 안과 밖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포기하는 가치판단을 하기 보다는 두 쪽이 상호적으로 대응하며 함께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서양사람들이 생각한 경험론과 합리론, 이에 근거한 유물론과 유심론의 이분법을 뛰어 넘는다.
유물론은 빅뱅이론처럼 세상은 모두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입장이다. 본래 마르크스는 이 물질을 사람들이 만들거나 대량생산한 인공물에 한정했다. 하지만 후일 개념이 확대되어 자연물도 유물론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과학을 종교로 삼는 사람들은 대부분 유물론자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유심론은 다소 전통 종교적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현대 인지심리학이나 뇌과학이 무의식과 기억, 인식의 상호성을 밝혀냄으로서 사람마다 세상을 인식하는 것이 제각각이라는 점을 밝혀냈다. 이로서 전통 종교들의 가르침도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과학은 전자현미경과 허블망원경처럼 새로운 기술을 동원해 과거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도록 만든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유심론보단 경험론=유물론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람이 밝혀낸 경험적 사실의 빈약함을 인정한다. 사람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는 점에서 유심론의 바탕은 여전히 탄탄하다.
한국사람들에게도 유심론과 유물론의 구분이 있다. 다만 이 구분이 경험적 느낌과 합리적 판단이 아니라 안과 밖의 관계로 여겨진다. 유심론은 안쪽을 중심으로 바깥쪽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다. 유물론은 바깥쪽을 중심으로 놓고 안쪽과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다. '참이다, 속이다, 겉짓이다'에서 보았듯 한국말은 안과 밖의 대응 관계를 놓고 참-거짓을 판단한다. 이런 태도는 안쪽과 바깥쪽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드시 안과 밖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말이 담고 있는'함께성=우주' 이념은 전통 종교의 유심론과 신흥 과학의 유물론을 경쟁을 뛰어 넘는다. 만약 유물론과 유심론의 알음과 믿음에 지쳐 새로운 생각의 바탕을 찾는 사람들에게 한국말은 새로운 알음과 믿음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믿음의 유형들
묻고 따져서 알음을 통해 믿음으로 나아가 이루는 일은 쉽지 않다. 믿음이 알음을 억압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바깥 경험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얼이'를 얻고, 이를 묻고 따져 기존의 알음을 새로운 알음으로 대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비판적 생각이라 말한다. 비판적 생각을 하는 사람은 '묻고 따져서 얻은 알음'을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알음과 믿음의 공존공생 상태를 유지한다. 자신의 믿음의 바탕을 열어놓어 믿음의 바탕을 크게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비판적 생각이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회의주의'자가 된다. 이 사람은 묻고 따지기는 좋아하지만 믿음 자체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믿음이 없어 태도가 모호하고 행동을 주저한다. 당연히 이루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지속적인 묻고 따짐으로 많은 알음을 갖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회의주의에 빠지면 무언가를 이루거나 새롭게 바뀌기가 어렵다.
또 한가지 유형은 '직관'과 '통찰'을 믿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묻고 따져 알아낸 알음과 믿음 상태를 계속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행동심리학에는 '휴리스틱'이란 개념이 있다. 휴리스틱은 일종의 항상성 유지다. 이런 사람은 묻고 따지기 보다는 자신의 직관과 통찰을 믿는다. 그렇다보니 자기 안에 빠져 믿음을 넓고 크게 가져가기 어렵다. 이런 경우는 주로 전문가들에게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자신이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직관과 통찰에 따라와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디자인 분야에 비슷한 경우가 많다. 어떤 디자이너들은 열린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멋진 작업을 관철시키기를 좋아한다. 이런 디자이너는 자신의 오랜 경험에서 획득된 전문성을 인정받길 원한다.
사람들이 과학을 믿는 것은 방법과 논리과정에 대한 공공성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공공적으로 인정된 방법과 논리를 갖추고 있기에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의 장점은 이룸이 빠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기에 묻고 따질 필요가 없이 바로 행동으로 나아간다. 단점은 자신의 전문성에 갇혀 시야가 좁다. 그래서 이런 유형은 예술과 법과 같은 특정 분야에서는 아주 유용하다. 하지만 여러사람이 함께해야 하는 분야에서는 다소 어울리기 어렵다. 특히 예술과 유사한 디자인의 경우가 그렇다. 여러사람이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디자이너의 전문성이 잘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방법과 논리과정에 있어 공공성을 획득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클라이언트를 설득함에 있어 많은 애를 먹는다.
마지막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믿는 유형이다. 요즘은 대중교육이 활성화되어 대부분 스스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찾기가 어렵다. 과거 종교가 지배하던 서양 중세사회는 이런 경우가 많았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으로 자신이 묻고 따져 밝혀낸 이성적 사실을 억압받았다. 조르다노 부르노는 화형까지 당했다. 데카르트는 이런 상황이 두려워 프랑스 말로 책을 썼다. 당시 마녀사냥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억압당했다. 이 억압은 19세기까지 이어져 다윈은 <종의 기원> 출간을 수십년 미루었다.
멀리 갈것도 없이 20세기 한국사회도 그랬다. 분단국가였던 한국은 북한에 대한 것이라면 모두 부정되었다. 바른말을 해도 북한편을 들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가거나 사회적 지탄에 시달렸다. 군부정권은 언론과 지식인들을 통제함으로서 사람들이 스스로 묻고 따지는 것을 막았다. 다만 한국사회는 중세기독교와 다르다. 믿음이 강력해서 알음을 억압했기 보다는, 믿음이 없었기에 이런 상황이 용인된 것이다. 참으로 허무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한국이 이렇게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 경제, 사회 전문가들은 여러 이유를 이야기한다. 나는 한때는 그런 말들을 믿고 의지했다. 그런데 요즘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 우연적 사건보다는 오랜시간 한국사람들이 함께 차려온 '한국말 말차림' 덕분이 아닐까 싶다.
믿음에 갇힘 = 미침
이번엔 '믿다'와 '미치다'에 대해 알아보자. '믿다'가 '밑'과 바탕을 함께하듯, '미치다'도 '밑이다' 혹은 '밑히다'로 '밑'과 바탕을 함께한다. '믿다'와 '미치다'는 '잡다'와 '잡히다'의 관계와 비슷하다. '믿다'가 바람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의지로 밑으로 간 것이라면, '미치다'는 자신의 의지가 무언가에 사로잡혀 밑에 머무는 상황이다. 쉽게 말해 '미치다'는 밑에 사로잡혀 갇혀 있는 상황이랄까. 그래서 '갇쳤다'와 '미쳤다(믿쳤다)'는 유사한 의미다.
선생님은 두 문장을 제시하며 '믿다'와 '미치다'의 차이를 설명하셨다. 다발말3은 말하는 사람이 '책'에 대한 임자성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의 의지로 '이것'을 '책'으로 잡아 여기는 상황이다. 반면 다발말4는 말하는 사람의 '책'이라는 말의 임자성은 갖고 있지만 자신의 의지가 책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이다. 다발말3은 의지가 열려 있지만, 다발말4는 의지가 닫히거나 갇혀 있는 상황이다.
미쳐서 갇힌 상황은 다시 두가지로 구분된다. 안에 미친 상황과 밖에 미친 상황이다. 우리는 종종 "미쳐 돌아버리겠어"라고 말한다. 이때 '돌다'는 360도가 아닌 180도이다. 사람이 앞에서 뒤로 돌아서는 것이 바로 '돌다'이다. 그래서 두번 돌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360도를 도는 경우는 "뱅뱅돌다"처럼 말로 두번 돈다는 암시를 하거나 "맴돈다"처럼 그 자리에 머물로 있음을 알린다. "미쳐 돌아버리"는 상황은 자신의 안에 갇혀 있는 상황이다. 무언가 노력해도 문제가 풀리지 않는 답답한 상황에서 "미쳐 돌아버리겠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아 안에서 뱅뱅도는 '미침'은 새로운 '알음'을 갈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안에서 벗어나 밖의 경험을 통해 '기존의 알음'을 '새로운 알음'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면 안에서 믿어 갇힌(미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밖에 미친 상황은 다발말4의 경우처럼 밖에 있는 어떤 대상이 사로잡한 것이다. 이런 경우는 뱅뱅 돈다기 보다는 무언가에 '빠져' 있는 상태다. 빠지다는 구멍의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이고, 빼다는 '빠+이+다'로 구멍에서 나오는 상황이다. '빠꼼'은 구멍에서 쏙 나온 상태이고, '빡빡'은 구멍에 꽉 끼인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말들을 통해 우리는 한국말에서 '빠'는 구멍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구멍은 널널한 것이 아니라 말그대로 빡빡한 구멍이다. 밖에 미친 상황은 빡빡한 구멍에 들어간 상황이다. 그래서 어떤 대상에 미친 사람은 그 구멍을 빠져나오기가 어렵다.
안이나 밖에 미쳐 있는 사람을 '광신도' 혹은 '중독자'라 말한다. 광신도는 어떤 종교적 지도자나 경전에 빠진 사람이다. 이 경우는 자신이 스스로 경험한 것에 기반하지 않는다. 묻고 따지지 않고 권위있어 보이는 무언가를 무작정 믿는 경우다. 이럴때 사람들은 "그 사람이 종교를 믿는다"라고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종교에 미쳐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19세기 종교는 이런 상황 때문에 몰락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15~18세기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이 극에 다다른다. 꼼꼼하게 묻고 따져 믿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광신도처럼 미쳐 날뛰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일반 신도들과 예지 신도들의 믿음에 실망을 주었다. 그래서 근대인들은 종교가 아닌 과학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믿음의 대상이 종교에서 과학으로 대체되었지만 사람들의 미침은 딱히 해결된거 같지 않다. 중제문명이 근현대문명으로 변화하고 이성(묻고 따짐, 생각하기)에 의한 '알음'이 중요해지면서 사람들은 경험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경험을 통해 알음을 얻고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가기 보다는 감각적 경험 그 자체에 몰두했다. 이를 눈치챈 자본가들은 감각으로 사람들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감각을 최대한 부풀린 자극적인 상품들을 생산하고 광고해 사람들이 스스로 묻고 따질 여유를 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매년 업그레이드된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들을 소비함으로서 스스로 묻고 따져 가치를 생산하기 보다는 그냥 가치가 주어지기만을 기다린다. 여기에 익숙해진 사람들을 우린 중독자라고 말한다.
중독자들은 알콜이나 마약 등 주로 자극적인 감각을 유발하는 대상에 미쳐있다. 정도가 덜하면 좋은 상품과 브랜드에 미친다. 중독자들은 새로운 상품이 나오면 새벽부터 상점 앞에서 출시를 기다린다. 마치 그것을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요즘은 어떤 특정 분야에 중독된 사람들을 '덕후'라고 말한다. '덕후'는 어떤 대상이나 분야에 대한 '전문가'라인 동시에 무언가에 빠져 있다는 뉘앙스도 갖고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알음'에 미친 상황이랄까. 아무튼 이 또한 지적인 중독자로 볼 수 있다. 이런점에서 중세 종교사회나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미쳐있다는 점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광신도냐 중독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미침의 정도
사람들은 혁명하는 사람들을 무언가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큰 오해다. 자신 안에 혹은 밖의 대상에 미친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맴돌기 때문에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다. 때론 새로운 무언가에 미쳐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급진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은 굉장이 보수적이다. 무엇보다 이 사람들이 변화를 일으키기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닫혀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보수적인 종교에서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거대한 종교 공동체에서 벗어났다. 이들은 급진적으로 세상을 바꾼다고 했지만 결국 많은 사람들의 희생만 초래하고 '저만' 혹은 '저들끼리'만 평화롭고 좋은 세상을 추구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우승열패, 즉 우월한 사람이 승리한다는 논리를 개발하고 경쟁을 장려했다.
경쟁을 통해 승리한 자는 무엇이든 누릴 수 있고, 패배한 약자는 무엇이든 빼앗겨도 상관없다. 중세사회에서 약자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라고 가르쳤지만, 현대사회는 약자와 가난한 사람은 패배한 실패자로 여겨져 비난 받는다. "네가 그러니까 그 따위로 사는거야!" 경쟁에서 패배한 사람은 그 짐을 오로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현대사회는 참으로 잔인하다.
사람이 경쟁 상황에 처하면 조급해진다. 올림픽 같은 스포츠 경기에는 개인전과 단체전이 있다. 여기서 승리하는 사람 혹은 사람들은 빠르고 센 사람이다. 가장 세고 빠른 사람은 빨리 승부를 보고 싶어 조급해한다. 그래서 달리기 같은 스포츠는 단체전보다는 개인전을 선호한다. 누군가와 승리를 공유하기 보다는 오로지 저만의 승리를 추구하게 된다. 반면 축구 같은 단체전에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기에 승리하려면 반드시 저들끼리 힘을 합쳐야 한다.
경쟁은 빠른 사람이 유리하다. 한국말에서 '빨리'는 '빨다'와 바탕을 함께 한다. 태어난 아기는 느끼기 보다 빨기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느낌은 빨기보다 항상 늦다. '느끼다(늧)'와 '늦다'는 바탕을 함께 한다. 빨기는 적극적으로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빨면 느낌이 온다. 이는 일종의 신경자극으로 이 신경자극에 빠지면 중독자가 된다. 이 중독자가 바로 미친 현대인이다. 중독자는 광신도 보다 오히려 더 미친 상태다. 광신도가 되려면 최소한 교주와 신도 등 공감하고 교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미침의 정도로 본다면 중독자는 '저만' 생각하는 가장 미친 단계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광신도는 '저들끼리'만 생각하는 두번째 미친 단계다.
'저만' 혹은 '저들끼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 설령 세상을 바꾸더라도 지배층만 바뀌어 저들끼리만 좋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에 세상이 더 나아졌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난 20세기 사람들은 중세의 잔재를 털어낸다는 명분으로 두차례의 거대한 전쟁과 크고 작은 내전을 치루었다. 이 과정에서 수억명이 희생당했고, 그 가족까지 치면 전세계인 모두가 고통에 시달렸다. 과연 이 고통스런 희생이 좋은 세상을 만들었을까?
분면 세상은 좋아졌다. 신분계급이 사라지고, 노예제가 패지되고, 과학기술로 전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었다. 전세계인의 약 10%는 삶의 질이 확실히 좋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상당한 사람들의 삶은 더 악화되었다. 게다가 산업혁명에 의한 환경파괴로 생태계가 크게 교란 되었고 미래 세대의 삶까지 위협하고 있다.
사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이 아닌 믿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느긋하다. 경쟁적으로 '저만, 저들끼리'가 아니라 '남까지' 나아가 '것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조급하게 앞서지 않고 느긋하게 뒤어 선다. 그러나 행동할때는 오히려 느긋한 이들이 조급한 사람들보다 앞선다. 모우가 함께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기꺼히 희생하기 때문이다.
앞서 '우주=함께함'에서 이야기했듯 모든 것이 함께하고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혁명적 변화로 인해 특정 누군가 혹은 계층에 이익이 돌아가는 것을 반대한다. 나를 희생하더라고 남이 더 좋아진다면 기꺼히 행동하는 사람들이다. 나아가 사람만이 아니라 함께하는 생명과 존재들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의 희생이 세상을 바꾼다.
이런 점에서 지난 200년간의 혁명에 성과가 있었다면 이를 주도한 사람들의 성과가 아니라 이 사람들을 믿고 희생한 사람들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의 믿음을 져버리고 여전히 경쟁을 부추기며 생활 속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희생한 사람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뭐란 말인가.
앞서 나는 '글'에 의지하는 사람과 '말'에 의지하는 사람을 비교하며 딜레마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다. 혁명을 주도하고 승리를 만끽하는 사람들은 주로 '글'에 의지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에 의지하는 사람들의 희생에 의해 그 자리에 있음에도 끊임없이 이 사람들을 누르려 한다. 이런 환경속에서 자라난 나는 '글'이 '말'보다 위대하고 높고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말'이 '글'보다 섬세하다는 사실과 섬세한 말이 섬세한 행동을 낳는다는 사실을 아는 이상 더이상 '글'이 '말'보다 좋은 것이라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글'보다 '말'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된다고 할까.
사람들을 선동한 것은 보편적 '글'이었겠지만 아마 진짜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들은 보편적 '글'보단 섬세한 '말'에 의지했을 것이다. 이들은 공공의 '말'을 공유하며 섬세한 행동으로 승리를 이끌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승리가 소수의 저들끼리만이 아니라 남까지 나아가 더 많은 존재들이 편안을 가져올 거이라 믿었을 것이다. 나는 이들의 바램과 믿음을 기리기 위해 우리는 미래의 교육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무엇에 미쳐=갇혀 있나
선생님은 우리가 생각과 공부 나아가 교육에 있어 덜컥덜컥 믿고 있는 것은 잘못된 믿음의 몇가지 사례를 말씀해 주셨다. 첫번째 잘못된 믿음은 한국말과 한글이 다르다면 점이다. 20세기 초 국어학자들은 한국말과 한글을 동일시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한국말과 한글이 같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들은 영국말과 알파벳이 같다고 믿지 않는다. 알파벳으로 영국말만이 아닐 프랑스말, 독일말 심지어 한국말을 쓸 수 있다. 당연히 한글로 한국말만이 아니라 영국말 등 다른 나라의 말 심지어 동물의 울음 등 각종 소리도 쓸 수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한국말과 한글은 다른 것이다.
두번째 잘못된 믿음은 '학습學習'을 '배우고 익히다'로 여기는 것이다. 한국말 '배움'은 몸에 배이는 것이다. 몸에 배이려면 먼저 익혀야 한다. 문자를 익히면서 글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고 익히다'는 아주 이상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學=배우다'를 의심하지 않고 그냥 그려러니 하는 이유는 정작 한국말 '배움'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학습'이라는 말을 고집하려면 '학學'은 '깨닫다'로 풀어야 한다. 익히려면 먼저 깨달음의 과정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깨닫고(學) 익혀(習)는 과정이 바로 배움이다.
세번째 잘못된 믿음은 한국말 논리를 '참과 거짓'이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는 앞선 강의록에서 지적했듯이 일본사람들이 truth를 眞으로, false를 假로 번역했기 때문이다. 한국사람들은 이를 묻고 따지지 않고 그냥 가져와 truth를 '참 진眞'으로 false를 '거짓 假'로 여겨 '참과 거짓' 말이 형성되었다. 한국말에서 참은 안과 밖이 같은 상태이고, 거짓은 '겉짓'으로 안과 밖이 다른 것이다. 영국말 논리에서 truth와 false는 안과 밖의 같고 다름이 아니라 두 대상의 대응을 말한다. 그래서 한국말로 truth는 '맞다'로 false는 '틀리다'로 풀어야 정확한 표현이다. 그래야 학생들이 '참과 거짓'의 안과 밖 관계, '맞다 틀리다'의 대응 논리를 구분해서 또렷하게 알 수 있다.
다섯번째 잘못된 믿음은 영국말 'being=존재'를 '있다'로 번약한다는 점이다. 한국말에서 '있다'는 존재가 아니라 상태이다. 영국말 'being=존재'는 한국말 '것'으로 풀어야 한다. 즉 한국사람에게 존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국말 beauty=美는 한국말 '아름다움'으로 번역된다. 이는 완전히 잘못된 번역이다. beauty=美는 감각적 자극에 가깝다. '아름다움' 보다는 '예쁨'이 더 어울리는 말이다.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나중에 선생님이 따로 풀어줄 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여서번째 잘못된 믿음은 한국말로 넓고 깊은 생각이 어렵다는 편견이다. 오랜시간 한국사람들은 중국말과 서양말을 갖고 넓고 깊은 생각을 하려했다. 그런데 외국말로 생각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외국말은 반드시 한국말로 풀어서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말로 넓고 깊은 생각이 어렵다는 편견때문에 토박이들이 쓰는 한국말이 아니라 중국의 한자를 빌려왔다. 일종의 동어반복을 해온 것이다. 밖의 것에 빠져 미친 상황이랄까. 외국말을 제대로 가져오려면 먼저 한국말의 바탕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한국말로도 넓고 깊은 생각을 할 수 없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한국말의 바탕이 탄탄하면 그 위에 중국말 서양말을 제대로 쌓아나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인문학에 있어 가장 시급한 것은 외국말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한국말에 대한 이해다. 즉 한국사람은 한국말에도 훌륭한 바탕이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사무침'은 소통
앞서 선생님과 나는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라는 질문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에는 '누구'의 문제는 가장 중요하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저만 혹은 저들끼리의 평화를 추구해왔다. 이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닌 배워야만 할 수 있는 '글'을 갖고 사람들을 선동하고 억압했다. 하지만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는 세상이 왔다. 계몽주의 만세! 신분에 관계없이 능력이 있으면 누구나 존경받을 수 있다. 자유혁명 만세! 나아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소통이 가능하다. 산업혁명 만세!
TV와 유튜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연예인과 유투버 대개가 글보다 말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대통령과 정치인, 시민단체 등의 사회지도층 대개가 법과 말에 능숙한 변호사이다. 이런 점은 이 시대가 글과 말 중에서 무엇을 더 중요시 여기는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대는 과거 수천년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과거에는 '글'을 독점한 사람들이 리더가 되었지만 이젠 그런 상황이 아니다. '글'이 활성화되기 이전 '말'이 더 중요했던 고대그리스 시대, 소피스트처럼 '말'을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다. 2500년전 축의 시대가 '말'에서 '글'로 전환된 것이었다면, 21세기 새로운 축의 시대는 '글'에서 '말'로 전환되는 시대가 아닐까 싶다.
세종은 <훈민정음>에 이렇게 썼다. "나랏 말싸미 듕귁에달아 문짜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이 말은 '한국사람의 말이 한자와 서로 맞지 않아서 한글을 창제하셨다'는 의미다. 나는 한국말이 퇴색되지 않고 여전히 살아있는 것은 글이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오히려 일찍이 글을 가졌던 중국말이나 서양말은 말이 문자와 글에 갇혀 말의 섬세함이 사라졌다. 반면 한국말은 다른나라 말과 달리 근래에 들어와 한글로서 표기되었기에 말의 맛이 여전히 살아있다. 덕분에 한국말은 바탕치기가 가능하다. '및'과 '밋'과 '밎'과 '믿'과 '밑'의 바탕이 같다는 점을 짐작하기에 '믿다'와 '미치다'의 바탕이 같음을 알 수 있고, '갖다'과 '같다'의 바탕이 같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영국말은 believe와 crazy의 바탕, have와 same의 바탕을 알기 어렵다. de와 com 등 몇가지 어두語頭만을 갖고 말의 바탕을 짐작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한글'이 활성화되는 지금 이 시대에 '한국말' 바탕치기에 대한 최보영 샘의 말씀이 반갑지 아니할 수 없다. 만약 선생님이 한국말에도 바탕이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과연 우리는 한국말에 바탕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아마 수많은 한국말이 서양말과 한자, 한글에 갇혀 그 바탕을 상실해 갔을 것이다. 한국말의 섬세한 바탕이 사라졌다면 우리는 영원이 '알음'과 '믿음'의 관계를 모르고, '믿음'과 '미침'이 바탕을 함께함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말이 사라지면서 과거 한국사람들과의 관계도 끊어졌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말은 글은 없었기에 바탕이 살아남았다. 그래서 과거의 한국사람과 현재의 한국사람, 미래의 한국사람은 바탕을 서로 공유할 수 있다. 세종이 말한 '사맛디'는 한자로 '소통'이고 영국말로 Communication이다. 한국말 사맛디는 '서로 맞다'를 의미한다. '사맛디=서로 맞다'가 한층 더 깊게 되면 '사무침'이 된다. '사무침'은 '서로 묻다'이다. '묻다'는 땅에 묻는 것일 수도 있고, 무언가가 몸에 묻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서로 묻는 것은 서로 통해 서로를 믿는다는 의미다. 즉 소통의 한국말은 '사무침'이라 볼 수 있다.
한국사람들은 세종 덕분에 대부분 한글을 읽고 쓸 줄 안다. 한글 덕분에 글에 대한 경외심과 신비함이 사라졌다 그래서 '말'에 대해 생각할 여지가 생겼다. 이 땅에서 이런 기회가 또 있었을까? 아마 처음일 것이다. 게다가 한국은 인터넷이 빵빵하게 터져 영상소통이 수월하다. 최근에는 한국말로 된 영화가 아카데미 상을 휩쓸고, 한국말로 된 노래가 빌보드 차트를 휩쓴다. 20세기 비틀즈가 있었다면 21세기는 BTS가 있다. 이들은 뉴욕의 광장에서 한국말로 인터뷰하고 한국말로 노래를 부른다. 세계의 사람들은 한국말의 의미도 모른채 한국말로 노래를 흥얼거린다. 최근에는 트로트가 대세다. 선생님은 트로트의 노래말이 대부분 한국말로 되어 있다며 트로트의 가락이 한국말의 음율에 잘 맞는다고 하셨다. 트로트가 유행하는 이유도 한국사람들이 한국문화와 한국말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 아닐까.
바야흐로 한국말 사무침=소통이 대세다. 요즘 한국사람들은 한국말로 노래하고 영화보고 대화하며 서로 묻고 묻히고 있다. 사람들은 편지가 아닌 전화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네이버가 아닌 유튜브로 검색한다. 과거처럼 글에 의해 소외되지 않고 말로서 사무칠 수 있게 된 것이다.
글 소통은 일방적이고 말 소통은 주고받는다. 글은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의 사무침이 엇갈릴 가능성이 높지만, 말은 서로 주고받으며 사무침을 조정할 수 있다. 그래서 말은 글보다 더 공감을 이끌어낸다. 현대는 말을 전달하는 기술들 덕분에 평화와 정의, 공정, 승리 등의 중요한 사회 가치가 글을 독점한 사람들만이 아닌 말을 공유하는 모든 사람들의 가치로 거듭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한국말 말차림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