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어준 현상이 만만치 않다. 이번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에 김어준이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김어준은 무엇일까? 대체 왜 사람들은 왜 김어준에 열광할까? 나는 이 느낌이 궁금해 그의 뉴스공장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 또한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맥락은 조금 다르다.
사람들은 그를 저널리스트라고 말한다. 물론 그는 저널리스트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라는 프레임으론 김어준이라는 현상과 역할을 잘 이해할 수 없다. 김어준과 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섬세한 언어가 필요하다.
나는 <역사는 디자인된다>라는 책을 썼다. 이 책을 쓰면서 '역사'와 '디자인'이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쓰고 나니 역사와 디자인의 차이가 느껴졌다. 아주 미묘한 차이인데 이 미묘함이 역사와 디자인 개념을 구분하는 결정적인 경계다.
역사가와 디자이너는 모두 과거의 사실을 수집한다. 하지만 둘의 목적은 미묘하게 다르다. 역사학자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근거로 사실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근거로 상상력을 동원해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때 역사는 일종의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주로 과거에 대한 내용이다. 반면 디자이너도 역사학자처럼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근거로 사실을 수집한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근거로 상상력을 동원해 디자인을 재구성한다. 이때 디자인도 역사처럼 이야기로 구성되는데 주로 미래에 대한 내용이다. 즉 방점이 과거가 아닌 미래에 찍혀 있다.
사람들은 매체 형식으로 역사가와 디자이너를 구분한다. 역사학자는 글을 쓰고, 디자이너는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한다. 물론 형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태도다. 만화를 잘 그리는 역사학자가 이미지로 역사를 구성하면 그를 디자이너라 부를 수 있을까. 디자이너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래픽 디자이너지만 여러분야에 걸처 많은 글을 쓴다. 나는 인과관계로 글을 쓰기 보다는 말과 글이란 매체를 갖고 이미지를 구성=디자인하는 느낌으로 글을 쓴다. 나에겐 글쓰기도 일종의 디자인이다.
다시 김어준으로 돌아오면, 대부분의 언론들은 자신들이 역사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실을 아주 중요시 여기는데, 김어준과 비슷한 영향력을 가진 손석희는 앵커시절 늘 '사실'을 강조했다. 손석희만이 아니라 모든 언론사의 기자들, 심지어 사실 왜곡을 지적받는 몇몇 보수 유튜버들조차 사실을 강조한다. 그럼 언론은 과연 사실만을 보도할까?
어떤 뜻에서 그런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실'은 자의적 해석에 따라 달라진다. 기억과 역사가 다른 점이 있다면 기억은 자의적 해석을 인정하는데, 또 기억이 변한다는 점을 인정하는데, 역사는 자의적 해석이 잘 인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역사의 변화는 항상 근거를 요구한다. 이 근거가 '사실'인데 문제는 이 '사실'이 기억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맙소사! 기억은 자의적이고 늘 변하는데!
이 점을 가장 잘 간파한 사람에 '알랭드 보통'이다. 그는 <뉴스의 시대>라는 책에서 뉴스를 쇼에 은유한다. 손석희는 알랭드 보통을 초청해 이야기를 나누며 뉴스는 쇼만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는데, 보통은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손석희도 보통도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뉴스는 쇼라는 점을.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못할 뿐이다. 왜냐면 뉴스의 사회적 위상을 고려할때 뉴스는 쇼가 되면 안되니까.
문제는 사람들은 쇼를 좋아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위해서는 뉴스는 쇼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언론사는 나와 같은 디자이너들을 고용해 기사를 쇼로 디자인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뉴스를 소재로 쇼를 기획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뉴스디자이너로서 나는 늘 이런 생각을 한다. "사람들은 어떤 뉴스쇼를 좋아할까?" 보통은 뉴스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디자이너의 눈의 늘 미래를 향한다. 모든 것이 빨리 변화하는 세상은 미래가 불확실하다. 근대 이후 오랜 전통과 진리 따위는 미래 예측에 도움이 안된다. 때문에 항상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불안하다. 디자이너는 이 불안한 사람들을 위해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사람이다. 엄혹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디자이너들은 늘 이런 일을 해왔다. 그래서 디자인철학자 글랜 파슨스는 <디자인의 철학>에서 이런 말을 했다. "(디자이너는) 어둠 속에서 화살을 날리는 사람이다"
디자이너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무슨 근거로 화살을 날릴 수 있을까? 바로 과거다. 과거의 사실들을 추적해 과거부터 현재까지 패턴의 흐름을 파악하고 현재를 진단한다. 문제는 진단된 현재의 상황이다. 현재의 상황이 좋으면 그 패턴을 그냥 유지하는 방향으로 날리면 된다. 만약 좋지 않으면 패턴을 강제로 바꿔야 한다. 패턴 변화를 주기 위해서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한데, 이 상상력에 동력을 주는 것은 바로 새로운 팩트! 바로 사실이다.
벌거벗은 사실은 그 자체로 주목되지 않는다. 쇼에 내보내려면 옷을 벗지게 입혀야 한다. 나는 과거 신문글꼴을 바꾸자고 주장할때 '양복'은유를 즐겨 썼다. "시골 장농 속에 있는 30년전 양복 그만 입고, 시대 트랜드에 맞는 새로운 양복 하나 맞춥시다!" 이 은유가 잘 먹혀 글꼴을 만들었다. 지금도 글꼴양복에 억대의 돈을 투자한 당시 경영진에 고마운 마음이다. 세련된 글꼴양복을 갈아 입은 신문이 나오자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들은 나에게 고마워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디자이너는 늘 무대 뒤 음지에서 움직이기에 사람들은 디자이너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 어렵다.
"기자는 사실을 맨 처음 발견하는 사람이다" 존경하던 회사 선배가 한 말이다. 기자는 역사학자처럼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 사실을 쫓는다. 그리고 그 사실들을 독자들이 읽기 좋게 기사로 재가공한다. 보통의 역사학자들은 먼 옛날 사실들을 수집한다면 기자는 아주 가까운 사실들을 수집한다. 그리고 어제의 일을 마치 오늘의 이야기처럼 구성한다. 이런점에서 기자는 초근접역사학자다. 기자들도 자신들이 시대를 기록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기에 스스로를 역사가로 여기고 있다.
이쯤에서 크로체가 등장해야 한다. 역사학자 크로체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모든 역사는 현재사다" 오래되었던 가깝던 과거는 과거다. 이 과거를 마치 현재의 일처럼 꾸미는 사람이 바로 역사가의 일이다. 문제는 '현재'에 대한 해석이다. 사실 현재는 없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경계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라는 경계위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과거인가 미래인가?
역사가는 언제나 과거를 결정한다. 손석희와 기자들도 과거를 결정한다. 그 이유는 사실에 자의성을 낮추기 위해서다. 그런데 반칙하는 자들이 있다. 바로 보수매체의 일부 기자들과 유튜버들이다. 이들은 미래로 결정한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지향함으로서 자의적 해석을 높힌다. 때론 원하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과거를 왜곡한다. 왜곡이라기 보다는 미묘한 말로 기억을 재구성시킨다. 한국말은 워낙 섬세해서 이런 짓을 하기 쉽다. 교묘한 말장난으로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보도록 강조점을 조정한다. 사실을 살짝 비틀기도 한다. 물론 빠져나갈 구멍은 늘 남겨 놓는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을 쓴 레이코프은 이를 '프레이밍'이라고 말한다.
프레임은 결국 '말'이다. 사람들은 레이코프를 정치평론가로 알고 있지만 그는 저명한 언어학자다. 미국 민주당 하는 꼴이 하두 답답해서 그런 책을 쓴 것이다. 언어학자의 정치 참여라고 할까. 아무튼 그는 말의 미묘함을 알고 있기에 정확한 지적을 한다. 바로 '프레임'이라는!
나는 디자인학교의 철학 교사 이성민 선생님 덕분에 레이코프라는 언어학자를 알게 되었다. 곧 이성민 샘의 첫 디자인철학 번역책이 곧 나온다. 제목은 <프레임 혁신>(키스 도스트)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디자이너는 프레임을 혁신하는 사람이다. 즉 디자이너는 과거의 사실을 근거로 현재를 진단하고, 변화를 주기위해 미래의 프레임을 혁신하는 사람이다. 이 프레임을 혁신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와 말'이 중요하다. 이미지는 그렇다치고 결정적으로 말이 중요한데, 말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기에 "무엇을 어떻게 말하냐"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이제 다시 질문을 던져보자. 저널리스트 김어준은 역사가일까 디자이너일까? 나는 김어준은 저널리스트 가면을 쓴 디자이너라 본다. 물론 '저널리스트 디자이너'라는 직함도 괜찮다. 나도 그런 셈이니까. 이런 점에서 나와 그의 근본이 비슷하다. 물론 영향력은 하늘과 땅 차이지만.
김어준은 늘 보수매체와 일부 보수유튜버들에게 분노한다. 왜냐면 그들도 김어준처럼 역사가가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 디자이너로서 보수매체의 역할은 오래 되었다. 진보매체는 '사실'이라는 프레임과 고고한 역사가라는 의식에 빠져 보수매체의 이런 행태(?)를 지적할뿐 그들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다. 뉴스를 디자이너의 눈으로 보지 않고 역사가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재밌는 점은 세상을 디자인 한다는 입장이 확고한 보수매체는 디자인을 중요시해 디자이너를 많이 고용한다. 반면 진보매체는 디자인을 중요시하면서도 디자인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 어떤 노력을 해야할지 모른다고 하는 편이 맞다. 왜냐면 진보매체는 늘 과거에 묶여 있으니까.
인포그래픽을 만드는 나는 '이미지'를 다루는 저널리스트 디자이너라면, 앵커인 김어준은 '말'을 다루는 저널리스트 디자이너다. 그래서 그의 영향력은 보수매체처럼 영향력이 지대하다. 아니 그 이상이다. 보수매체는 다소 음흉한데, 보수매체 기자들도 기자들인지라 역사가처럼 되야 한다는 강박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목적을 숨긴다. 반면 김어준은 솔직하다. 확고한 자기 목적을 전면에 내세우고 전략을 짠다. 그에게 뉴스는 미래을 위한 소스일뿐이다. 더 확실한 소스를 찾기 위해 사실을 중요시 여긴다는 점에서 그는 마치 디자이너처럼 뉴스를 대하고 있다.
뉴스 독자와 시청자는 김어준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다. 적어도 김어준에게 위선은 없다. 반면 보수매체는 겉과 속이 다르다. 까만 속을 감추고 점잖게 선을 추구하는듯 말하기에 위선적이다. 오히려 김어준은 다소 막말을 한다. 굳이 위선과 견준다면 위악적이랄까. 사람들은 위악보다 위선을 싫어한다. 김어준은 자신의 이미지를 위악으로 보여주면서도, 마음을 비추는 말은 솔직함을 앞세운다. 겉과 속이 다르면서도 자신의 진짜 속내는 투명하게 보여줌으로써 보수매체의 위선을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한다. 이런 점에서 김어준은 참 싫어하기 어려운 캐릭터다. 특히 한국사람들에겐 더 그렇다. 게다가 위선은 위악을 이기기 어렵다. 아니 절대 못이긴다. 보수매체는 늘 진보정치의 위선을 비판해 왔기에 더 그렇다. 그래서 보수매체에게 김어준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다. 김어준 앞에선 자신들이 위선자가 되니 돌아버릴 것이다. 어휴, 나 같아도 미쳐버릴 거 같다.
여기에 그의 매력이 있다. 나는 진보매체에 있는 디자이너로서 진보의 위선이 늘 아쉬웠다. 이 아쉬움을 시원하게 날려주는 사람이 바로 김어준이다. 그가 디자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아주 좋은 디자이너의 자질을 갖추고 있다. 아니 이미 탁월한 디자이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한다. 마치 커다란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빛나 보인다고 할까. 이 다이아몬드는 거친 원석이라는 점이 포인트다.
김어준은 과거를 기록하는 역사가가 아닌 미래를 탐험하는 디자이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방송을 들을때 과거가 아닌 미래 프레임에 관심을 둔다. 오늘은 어디로 화살을 날릴까? 칠흑 같은 현재의 어둠속에서 그의 눈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이 궁금함을 참지 못한 나는 오늘도 역시 그의 방송을 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