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가 끝난지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왕조체제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독재와 왕조는 사실상 같은 것이다. 가령 대통령이 있다고 볼때 이 대통령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를 왕이라 여기고, 싫어하는 사람은 그를 독재자라 여긴다. 독재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대안으로 주장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다. 사람들은 먹고사는 사적인 일이 많아서 공적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할 사람을 선거로 천거하는데 그 사람이 바로 국회의원이고, 지자체장이다. 선거로 선출되었다이지 사실상 이 사람들은 이 시대의 귀족들이다. 귀족이란 사람들을 부릴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를 권력자라 부른다. 이 귀족=권력자가 부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뽑아준 사람이 아니라 공무원이다. 공무원은 선거가 아닌 시험을 보아 전문성을 인정받아야 한다. 귀족=권력자들은 이 공무원 전문가들을 부려 공적인 일을 수행한다.
이 귀족들이 타락하면 이를 '과두정'이라 한다. 과두정이란 '적을 과寡+머리 두頭'의 합성어로 적은 사람들이 권력을 독점한다는 뜻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몇년마다 선거로 귀족들을 바꿈으로서 과두정을 방지한다. 하지만 독재와 왕이 딱히 구분되지 않듯이, 귀족정과 과두정도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 한번 귀족=권력자가 되면 이 세계에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 결탁해 아주 오랜시간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한국은 해방뒤 지금까지 몇몇의 세력이 왕과 귀족의 자리를 독점했다.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여기에 질린 사람들은 직접민주주의를 주장하는데... 이건 실현하기 아주 어렵다.
사람들은 우리 사회를 민주정이라 여기는데 살펴보았듯 우리 사회는 민주정이 아니라 혼합정이다. 왕정(대통령)과 귀족정(국회의원, 지자체장, 사법권력) 그리고 민주정(선거제도)가 섞여 있기 때문이다. 실제 권력이 대통령과 귀족들에게 몰려 있다는 점에서 현실 정치는 사실상 왕정+귀족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행정부를 장악한 대통령의 권한이 국회보다 더 막강하다는 점에서 왕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독재를 우려하는 사람들은 국회의 권력을 항상 강조한다. 이는 왕정의 대안으로 귀족정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국회중심의 내각제도는 아예 귀족정을 선포하는 것이다.
정치체제로서 대한민국은 권력자들을 좀 더 빠르게 순환시킨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조선왕조와 큰 틀에서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대한민국과 조선왕조의 사회가 비슷하다는 것은 아니다. 공식적인 신분제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대한민국과 조선왕조는 서로 건널 수 없을만큼 거대한 차이가 있다.
자 이런 배경을 놓고 지금 큰 문제가 되고 있는 시민단체를 생각해보자. 나는 그들의 선의와 노력, 희생이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언론에서 마구마구 지적하는 회계 문제도 완전히 잘못된 프레임이다. 이들이 돈을 벌려는 목적이었다면 애초에 이런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장담하긴 어렵지만 정의연 정도 규모의 단체라면 회계 부정도 거의 없을 것이라 본다. 지금 나오는 문제들은 모두 정치적 싸움에 휘말린 이슈게임일 뿐이다. 귀족들의 놀이에 놀아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나는 이들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생각에 이 단체들의 가장 큰 문제는 정치시스템이다. 시민단체들의 운영이나 의사결정과정을 보면 주도자 대표자 한 사람에 과도하게 집중된다. 거의 왕정=독재정에 가까운 형태다. 의결시스템을 둔다고 해도 귀족정이 잘 되지 않는다. 의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단체의 독재자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국회중심의 귀족정을 주장하는 시민단체의 의결과정이 귀족정으로 변한다면 시민단체는 거대한 변화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물론 이 조항에 대한 여러 논란이 있지만 난 이 조항만 잘 새겨도 좋은 사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민주+왕국'에 가깝다. 여러사람의 의견이 반영되기 보다는 한사람의 의견이 과도하게 반영되는 구조다. 그래서 그 한사람의 책임감도 과도하게 무겁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이다. 책임의 무게에 얼마나 짓눌렸으면,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기에 그런 선택을 했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문제는 잘못된 선택은 한사람의 책임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명박근혜 두 사람의 잘못된 선택은 두 사람을 구속시킨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실제로 그 책임은 모두가 다 짊어지어야 한다. 그만큼 이제 우리 사회도 판단과 결정을 함에 있어 되도록 여러사람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사회의 정치시스템과 이와 닮은 시민단체의 구조도 변화해야 한다.
나는 그 변화의 사례가 기업에 있다고 본다. 나는 결코 친기업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기업가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가는지 알고 있다. 기업은 살아남기 위해 조직 프레임을 혁신한다. 왕정이 필요하다 싶으면 기업총수중심으로 가고, 이것이 어렵다 싶으면 전문가를 고용해 귀족정으로 간다. 이조차 어려우면 직급과 조직을 따로 두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의사결정 구조를 선택하기도 한다. 즉 다양한 정치체제가 공존하고, 공생한다. 때론 급변한다.
나는 우리 사회의 정치도 이런 방식이었으면 좋겠다. 제도 정치가 어렵다면 적어도 시민단체만이라도 이런 길을 갔으면 한다. 이런 점에서 이번 정의연 사태는 의미가 있다. 지금 이 단체의 30년 활동의 가치가 할머니 한분과 국회의원이 된 대표, 한두사람의 말과 행동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30년 동안 이 활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은 어쩌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