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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러 생각

禮에서 樂으로

by 윤여경

다석 유영모 샘 글을 읽다가 '예禮'라는 말의 뜻을 또렷히 알게 되었다. '禮'라는 글자는 '시示'와 '풍豊'이 합쳐진 것으로, '示'는 제사상이나 신을 의미하고, '豊'는 풍성한 음식을 의미한다. 종합하면 제기 위에 풍성하게 차려진 음식이 바로 '禮'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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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은 곧 유교의 바탕이론이다. 즉 유학은 종교적 신학이란 뜻이다. 다만 공자가 '불어괴력난신不語怪力亂神(괴상한 힘이나 어려운 신은 말하지 않겠다)'을 말해 종교처럼 느껴지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유교에는 '관혼상제'의 의식과 '제사'라는 의례가 있어 종교의 형식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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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의 전통을 받아들인 조선은 송나라와 명나라가 그랬듯 제정일치 사회였다. 즉 종교와 정치가 일치된 사회였다. 유교의 사제들인 선비(사대부)는 정치를 겸했다. 그래서 선비들에게 사제들의 '제사祭祀'와 정치인들의 '제도制度'는 다르지 않았다. 제정일치 사회에서 제사의 '예'가 제도의 '예'로 여겨지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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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은 제사와 제도는 다르다. 근현대 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꼽으라면 분업화다. 나는 조선과 근대의 가장 큰 차이가 제정일치에서 제정분리라고 보는데 이 또한 분업화이다. 종교와 정치가 일치가 되면 자유와 민주가 들어서기 어렵다. 좀 더 스스로 말미암고, 좀 더 많은 사람(民)이 주체적으로되기 위해서는 먼저 종교적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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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사람들을 묶어주는 힘이기 때문에 정치하기가 용이하다. 그래서 종교가 자유로워지면 각자가 따로 생각하기에 정치가 어려워질 수 있다. 의사결정 과정이 늘 시끄럽고 지체된다. 한마음 한뜻을 이루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계몽주의자들은 늘 주장했다. 스스로 묻고 따지며 똑똑해지라고. 대중교육은 이런 바탕에서 실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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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따져 똑똑해지는 것에는 두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무엇을 묻고 따질 것이냐"이다. 보통은 '무엇'을 분업화된 전문직업으로 여긴다. 그래서 오로지 전문 분야의 지식을 묻고 따지는 것을 소명으로 여겼다. 둘째 문제는 "어떻게 묻고 따질 것이냐"이다. 가장 손쉬운 방법이 외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전문분야의 지식을 외워 시험에 통과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냥 외우면 되니까 굳이 묻고 따질 필요가 없다. 참으로 허망한 '묻고 따지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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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가다보니 세상일이 직업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인문학을 공부했다. 인문학을 공부하다 보니 이곳의 묻고 따지지는 직업적 경계가 없음을 알았다. 일단 묻고 따지는 대상도 전문지식이 아니라 '말' 그 자체임을 알았다. 묻고 따지는 방법도 단순히 외우는 것이 아니라 훨씬 복잡하다. 연역이니 귀납이니 귀추니... 등등 다양한 생각법들이 있다. 이 생각법을 갖고 주요한 개념(말)을 묻고 따져 풀면 인생의 많은 어려움이 해소될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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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방향은 맞는 것 같은데, 인문학 공부는 살아가는 일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요즘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말을 묻고 따져서 그런거 같다. 내가 경험에서 쓰고 있는 말, 바로 한국말을 묻고 따지고 풀어야 그것을 내 삶으로 온전히 가져 올 수 있는데... 이 당연한 사실을 인문학 공부 10년이 지나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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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에는 '예禮'라는 말이 많이 들어간다. 그런데 이 말의 바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또 그 말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은 몇이나 있을까. 제사, 제도라는 말도 그렇다. 이걸 알아야 조선시대와 근현대의 경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걸 모르니 조선시대의 것과 근현대의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어가야 할 것은 버리고, 끊어내야 할 것은 이어가고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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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가야 할 것은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신라시대와 현재가 다르지 않은 것들이다. 바로 한국말과 한국사람이다. 하나 더 있다면 한글이다. 끊어가야 할 것은 사대주의와 제정일치적 태도다. 사대주의란 외국에만 보편적인 것이 있다는 태도이고, 제정일치적 태도란 신념과 정치를 분리하지 못하는 태도다. 즉 신념은 쉽게 바뀔 수 없지만, 정치적 책임은 늘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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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禮'는 분별이고 '락樂'은 조화다. 분별은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달라지는 예를 조화롭게 만드는 것이 '락'이다. 그래서 과거 제정일치의 예와 현재 제정분리의 예는 달라야 한다. 과거 한자어 중심의 지식의 예와, 현재 한국말 중심의 지식의 예는 달라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종교과 정치 그리고 한국말의 예에 걸맞는 새로운 조화=락樂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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