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람들은 말구조 때문인지 '행위'라는 말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진듯 싶다. 최봉영 샘은 이를 뉴턴의 가속도 법칙에 은유하시는데, 이는 일종의 능동성-수동성 개념이다. 요즘 등장하는 철학적 생각들의 경향을 보니 크게 두가지로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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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몸과 머리의 구분이다. 몸은 물질, 머리는 이성(생각)이라는 접근으로, 이제 생각이 아니라 물질적 몸을 살피자는 주장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는데, 이는 사람의 감각과 생각을 별개의 것으로 보는 태도 탓이다. 사람을 신체와 정신으로 구분한 데카르트의 현대적 해석이랄까. 이건 큰 오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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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 '머리'에 바탕은 '멀리'다. 사람은 머리로 멀리 본다. 반면 몸은 가깝게 본다. 한국말로 '본다'는 '경험하다'이다. 눈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들어보고, 맛보고, 만져보고, 생각해보고라고 말한다. 이 '본다=경험하다'에 감각과 생각이 포함되어 있다. 즉 이성적 생각은 멀리 경험하는 것이고, 몸의 감각은 가깝게 경험하는 것이다. 이렇듯 몸과 머리는 멀고 가까운 역할의 구분이 있을뿐 감각과 생각의 구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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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행위다. 서양말은 동사를 가운데 두고 능동과 수동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행위는 동사 앞에 위치한 능동자에게만 해당된다. 동사 뒤에 나오는 수동은 늘 당하는 위치에 있다. 동사 앞이 이성의 주체라면 동사 뒤는 이성의 대상이자 이유랄까. 능동이 가속도를 늘리면 수동은 그 힘만큼 당한다. 이 도식은 계급, 권력, 중심과 주변, 사람중심주의와 같은 근대적 태도를 낳았다. 그런데 요즘 지금까지 능동의 대상이었던 수동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된듯 싶다. 그래서 수동에도 행위를 부여한다. 수동의 역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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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국말은 능동과 수동의 구분이 또렷하지 않다. 행위자도 어느 한쪽에 두질 않는다. 이쪽과 저쪽이 서로 함께해 풀어내는 느낌이다. 그래서 '행위'라는 말이 서양사람들처럼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이를 최봉영 샘은 뉴턴의 3법칙 '작용-반작용'에 은유한다. 즉 서양말은 2법칙 '가속도'라 행위와 능동성이 중시되는 2진법, 2차원의 말이라면, 한국말은 3법칙 '작용-반작용'의 함께성이 중시되는 3진법, 3차원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