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공예 개념 이야기한 김에 하나 더 보태면, 윌리엄 모리스와 야나기 무네요시의 차이다. 난 둘을 모두 좋아한다. 왜냐면 둘 모두 디자인의 어버이로서 디자인의 양면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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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는 미술공예운동을 통해 디자인 개념이 형성되는데 바탕을 제공했다. 이때 모리스가 말한 디자인은 바로 '인공적 탁월성'이다. 쉽게 말해 '잘 만든 물건'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야나기 또한 민중공예=민예라는 개념으로 디자인의 또 다른 바탕을 제공했다. 야나기에 의한 디자인은 '자연적 탁월성'이다. 인위적 노력에 의해 형성된 탁월함이 아니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탁월함이 바로 '자연성'이다. 그래서 모리스는 다소 엘리트적이고, 야나기는 다소 민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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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의 엘리트주의는 그렇다치고 요즘엔 나는 야나기에도 약간의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왜 야나기는 일상의 물건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을까? 그것도 왜 하필 조선의 막사발과 달항아리 같은 것일까? 그는 이 물건들에서 무엇을 본 것일까? 야나기를 다루는 책에선 이구동성으로 불교이론을 앞세우지만 난 믿지 않는다. 이념으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최초 발견자는 느낌이지 이념이 아니다. 이념은 느낌을 합리화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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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평전에서 발견한 인물은 영국의 버나드 리치이다. 대영박물관의 조선관을 만든 그는 달항아리를 안고 떠나며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고 말했다. 야나기는 버나드 리치와 상당한 친분이 있었고 그의 눈을 통해 조선공예에 눈을 떳다. 그럼 왜 버나드 리치는 조선의 달항아리를 좋아했을까? 나는 말레비치로 대표되는 러시아 절대주의와 구성주의를 의심한다. 그렇다. 추상성! 버나드 리치도 그쪽 취향이지 않았을까. 그럼 야나기도 결국... 불교미학은 얼어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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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와 야나기의 구분에서 결정적으로 짜증나는 부분은 모리스는 숙련장인들의 노력과 능력을 존중했고, 야나기는 숙련장인의 노력과 능력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존경받던 조선의 오랜 숙련 장인들이 뻘쭘해지는 상황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인들은 둘 중 하나를 해야만 했다. 유학가거나 일부러 대충 만들거나... 둘다 아니면 그만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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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은 해방후까지 지속된다. 야나기의 지극한 사랑 때문에 한국사람들은 이 악어눈물에 속았다. 스스로 자신의 숙련성과 전문성, 즉 예술과 공예, 디자인의 주체성을 내려놓고 결국엔 상실하게 된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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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야나기의 민예 관점은 훌륭하다. 일상을 낯설게 해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해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반쪽이다. 모리스의 미술공예 전문역량으로 나머지 반쪽을 채워야 한다. 이렇게 온전한 하나로서 우리 스스로의 숙련된 전문성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