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도식을 그려보았다. 지난 수개월동안 최봉영 샘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안과 밖'의 인식과 '저만'에서 '것까지'의 과정이다. 이 근본적 인식에 눈을 뜨면서 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론 왜 사람들은 안과 밖의 관계를 인식하지 못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이건 차차 생각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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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동안 육아를 통해 아이를 관찰해 왔다. 내가 알고 있는 두명의 발달심리학자가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피아제는 사람이 자아중심성에서 사회성으로 발달한다고 주장했고, 반대로 비고츠키는 사회성에서 자아중심성으로 발달한다고 주장했다. 비고츠키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에 둘의 주장은 간극만 남긴채 타협되지 않고 있다. 나는 둘 중 누가 옳은지 궁금해서 내 아이의 발달 과정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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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관찰 결과 피아제와 비고츠키가 모두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다만 둘의 관점이 달랐다. 피아제는 아이와 밖의 관계를 관찰했고, 비고츠키는 아이의 내면(안)을 관찰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피아제는 아이들의 놀이과정을 살폈다. 반면 비고츠키의 유명한 저작이 <생각과 말>이란 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비고츠키는 아이들의 생각과 말에 집중했다. 그래서 반대의 입장이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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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때 '풍류'라는 관점이 등장했다. 나는 이 관점이 한국사람들이 불교를 통해 인도(서역)과 중국의 인과성을 인지한 것은 아닐까 싶다. 불교를 한국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함께성을 기본으로 삼은 한국말에 인과성이 더해진 것이다. 이는 실로 놀라운 인식 전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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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이 지나 서양사람들은 거꾸로 함께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20세기말 경영학과 최근의 철학경향을 보면 이런 흐름이 뚜렸하다. 인과성을 기본으로 삼은 서양말에 함께성이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또한 놀라운 전환이 되길 기대한다. 신라시대 이후 한국이 그랬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