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최봉영 샘의 이야기를 듣고 글을 읽으며 인문학 방법론에 있어 어떤 전환기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이 방법론은 '글로 하는 인문학'이 아닌 '말로 하는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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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틀린 표기를 교정해주길 좋아한다. 가령 "나와 너는 갖은 점이 많아"라고 말하면 '갖은 -> 같은'으로 교정해준다. 발음을 소리나는 그대로 표기하면 '가튼'이 맞는데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표준화된 표기에 맞도록 교정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글에 의한 인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글로 써져있는 것이 틀리면 아주 거슬리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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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언어를 다루는 학문이다. 보통 인문학 하면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말하는데 이때 언어란 주로 '말'이 아닌 '글'을 의미한다. 인문학의 바탕이 되는 자료는 반드시 글로 표기되어 있어야 하고, 연구결과도 반드시 글로 표기되어야만 한다. 그러면 글로 만든 증서로 학문의 성과를 보장해준다. 글과 글 사이에 수많은 말이 오가지만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글'만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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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보니 사람들은 '말로 하는 인문학'은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사실 플라톤 이전, 공자 이전에는 모두 말로 하는 인문학이었는데, 그 시대의 위대함은 인정하고 동경하면서도 그들의 했던 학문적 방법론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으며, 그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는 것조차 꺼려하는듯 싶다. '말로 하던 인문학'이 대세이던 시절 플라톤은 '글로 하는 인문학'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는데, 당시 플라톤은 상당히 많은 저항에 부딪쳤다. 마찬가지로 현대는 '글로 하는 인문학'이 대세인 지라 '말로 하는 인문학'은 많은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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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대세는 말로 하는 인문학으로 전환되고 있다. 이미 사람들은 책보다는 영상을 많이 보기 시작했다. 검색도 구글보단 유튜브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글에 익숙한 나조차 이미 그러고 있으니까. 공부 또한 책보다는 영상으로 하며, 글을 잘 쓰는 사람보다는 말을 잘 하는 사람을 인정한다. 아마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의 시대가 우리 시대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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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말로 하는 인문학'은 어떤 것일까? 지금까지 경험상 '발음'에 의한 언어가족을 찾는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그 '가족유사성'과 '언어게임'이 바로 '말로 하는 인문학'에 가깝다. 가령 앞서 말했듯 "나와 너는 갖은 점이 많아"라는 글을 읽고 발음기호를 교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어? '갖다'와 '같다'가 발음이 같네... 뭐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같다'라는 말과 '갖다'라는 말의 발음이 같기 때문에 바탕 또한 동일할 것이란 추론에 이른다. 즉 서로가 '같은' 애플 핸드폰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 너, 나랑 같은 핸드폰을 갖고 있네"라고 말한다. 그래서 '같다'는 '갖다'에서 비롯된 말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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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에는 이런말이 진짜 많다. 아마 영어에도 중국어에도 이런 말이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표준표기법과 발음기호의 표시에만 몰두하면 앞서 말한 현상은 결코 알 수 없다. 즉 '말=언어'의 바탕이 무엇인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이 얼마나 슬픈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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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샘은 이 방법론을 '바탕치기'라고 하셨다. 나는 이 바탕치기로 한국말의 많은 바탕을 알게 되었는데, 최근 흥미롭게 접한 '겉'의 경우 '것'과 깊은 연관이 있고, '겉=것'은 금으로 그어진 상태라는 점에서 '긋다' '글' '그림' '그릇' 등과 연관이 있고 '그만(금안)하다'와 '그만두다=금안에 두다' 같은 말과도 연관이 있다. 이 연관성은 모두 '말로 하는 인문학'적 방법론, 즉 발음의 가족유사성에서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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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하는 인문학'으로 찾아낸 엄청난 사실도 흥미롭지만 요즘은 방법론 그 자체에 흥미가 간다. 왜 사람들은 이 방법론을 쓰지 않았을까? 왜 이 방법론을 말장난으로 여기며 어떻게든 폄하하려고 했을까? 실제로 언어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고 앞으로 이런 식으로 만들어져 갈텐데... 이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현실 나아가 똑똑한 사람들이라 자칭하는 사람들이 별로 똑똑하지 않다는 현실이 조금은 슬프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