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에서 '공공' '공정'이란 무엇인가?

by 윤여경

공공, 공정, 정의 참으로 많이 듣는 말이다. 나 또한 이 말들을 많이 쓰지만, 솔직히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물론 이 말들은 모두 한자어로 각각의 한자를 풀라고 하면 할 수 있다. 가령 '공공'은 여덟개의 공동 경작과 맞들어 협동하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다. 이를 풀어 '공공'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장황해져 모호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너무 옛날 감성이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을 때도 모호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 책은 유래없던 인문학 베스트셀러로 참 많은 사람들이 읽었는데 이 책이 무엇을 말하는지 해설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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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모호한 말들의 경우, 이 말들을 한국말로 풀어보면 조금 느낌이 온다. '공공'은 '그 위'를 말한다. 함께하는 사람들 위에 있은 것이 바로 '공공'이다. '공정'과 '정의'는 모두 영어로 'justice'인데, 한자든 영어든 모두 의미가 흐릿하다. 그 이유는 공정과 정의의 스팩트럼이 비교적 넓고 맥락과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샌델의 책이 어려운 이유는 이 탓이다.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물었으면 그것이 '무엇'이라고 알려주면 되는데, 샌델은 또렷하게 '무엇'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공공과 공정=정의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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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때그때'이다. "도대체 어떤 때가 '그때 그때'라는 거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이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내가 알기론 유일한데 바로 늘 언급하는 최봉영 샘이다. 샘은 '그때그때'를 네가지 경우로 구분한다. '저만/저들만/남까지/것까지' 혹은 '나만/내쪽만/다른쪽까지/모든것까지'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네가지 경우에 따라 공공과 공정(정의, justice)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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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선생님은 전화로 한국말에 있어 '공공성의 네가지 범주' 구분을 발견하셨다며 들려주셨다. 순서대로 나열하면 '같게 하는 공공성' '고루하는 공공성' '두루하는 공공성' '널리하는 공공성'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답게하는 공공성'이다. 선생님은 공공을 '그위'라고 말하시길 좋아하니, '같게 그위' '고루 그위' '두루 그위' '널리 그위' 그리고 '다움 그위'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 마지막 '답게하는 공공성(그위)'은 앞선 네가지 분류를 통합한 표현으로 가장 상위의 공공(그위)성이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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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과 나는 이 구분을 가지고 저만/저들만/남까지/것까지의 구분과 연관지어 공공과 공정의 관계를 살펴보았고, 서양사람들과 중국사람들, 한국사람들이 어떤 공공성과 공정의 개념을 갖고 있는지 따져 보았다. 가령 '저만'에 있어 공정한 경우는 '같게'하는 것이다. 저만을 중시하는 경우가 '개인주의'인데 이 경우는 모두가 평등하게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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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저들만'에 있어 공정한 경우는 '고루'하는 것이다. 이 경우를 '공동체주의'라고 말하는데, '공동'은 말 그대로 서로 같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능력이나 경우에 따라 불평등, 차별과 차등이 생긴다. 공동체 사람들은 이 차등이 '고루고루' 이루어져야 공평하다고 본다. 즉 이때의 공정이란 똑같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즉 '저만'에 있어 불평등과 '저들만'에 있어 불공정이 다르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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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것은 '두루하는 공공'과 '널리하는 공공'이다. '두루'한다는 것은 '남'까지 아우르는 것이고, '널리'한다는 것은 '것=모든 존재'까지 아우르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런 태도는 종교 외에는 별로 거론되지 않는다. 사회, 경제는 대부분 '저만과 저들만'의 공공, 공정을 얘기할 뿐이고, 베트남전쟁 이후 정치에서 가끔 '남까지'를 다루고, 최근 환경운동가와 과학과 인류학이 종종 '것까지'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말하는 공공, 공정(정의)은 대부분 저만 혹은 저들만을 말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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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과 저들만의 공공성과 공정은 언듯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르다. 저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편가르기를 극도로 거부한다. 저들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편을 가른다.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은 오히려 '저만'을 강조하는데, 그녀가 말하는 '생각하지 않음'이란 '저들만 생각함'을 의미한다. 아이히만은 저들만 생각했기에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다. 만약 '저만'을 생각했다면 '유대인'이 아니라 각각의 사람들로 여겨 그런 극악무도한 행위로 나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인의 윤리는 '저만'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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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저만'이 '저들만'보다 꼭 좋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일을 하면서 종종 '저만'을 중시하는 사람을 만난다. 이 분들은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왠만하면 편을 들어줄 법도 하고 그래야만 하는 상황인데도 객관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그 과정에서 저들만의 공동체는 깨지고 일은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저들만을 위하는 사람의 희생을 낳게 된다. 공동체는 각자의 '바램'이 일치해 모인 것이지만, 일을 이루어냄에 있어 희생은 결국 '저들만'의 공공성과 '고루'의 공정 개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저만 위하는 히틀러와 저들만 위하는 아이히만의 차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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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까지 것까지도 마찬가지다. 나는 환경공부로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기에 오로지 '것까지'의 공공과 '널리'하는 공정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저만, 저들만, 남까지의 태도에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말과 글로 많은 이들을 불편하게 하였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 하지만 큰 상처를 겪으며 결국 그것만이 옳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내 곁에 있는 사람도 중요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남까지'는 아마도 '인문주의'에 해당될 것이다. '것까지' 공공을 추구했던 나는 일찍부터 '인문주의'를 거부했다. '인문주의'가 '인간중심주의'로 읽혔다. 즉 '오로지 남까지'는 환경파괴의 위험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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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공공과 공정(정의)를 섬세하게 구분하고 분류해서 풀어본 적이 없다. 늘 흐릿하게 퉁쳐서 그때그때의 감정을 쏟아내었을 뿐이다. 오늘 최봉영 샘과의 약 1시간 통화를 통해 이제 비로소 공공과 공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이 정도나마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은 플라톤의 <국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등 여러 정치학 책을 읽은 덕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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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공공과 공정은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완벽하지 않다. 그때그때마다 다른 공공와 공정의 적절함이 달라진다. 이를 하나로 통합해 모든 공공을 공정하게 만드는 절대 반지 같은 개념이 바로 '답게하는 공공' '다움 공정'이다. 이 다움 공공과 공정을 알려면 먼저 저만, 저들만, 남까지, 것까지가 모두 있음을 알고 이를 분류해 그때그때 무엇이 어떻게 다른 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때그때 어떤 공공과 공정이 진정한 공공답고 공정다울 수 있는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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