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론

by 윤여경

작년 가을즈음 나는 최봉영 샘과 한참을 논쟁했다. "저는 '그'가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아니지 우선은 '이'고 '그'는 '이'에 따라 나오는 것이지" 선생님은 한참을 설득했지만 난 고집을 꺽지 않았고, 나중에 공부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되었다. "아... 선생님이 맞았구나... '이'가 '그'에 앞서는구나"


조선시대는 '이'와 '기'를 나눈 '이기론'이 있었다. 선비들은 세상의 결인 '이'와 개별적인 합체인 '기'를 놓고 무엇이 우선인지 논쟁을 벌였다. 원리와 현상 중 무엇이 우선일까... 이는 근본적인 제1원리나 가치의 우선순위를 찾는 서양철학 논쟁과 비슷했다.


선생님과 내가 나눈 '이'와 '그'에 대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하다. 심지어 이기론의 발음조차 비슷하다. 하지만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 이 논쟁은 근본원리도 아니고 보편과 개별의 오랜 중세적 태도도 아니다. 사실 과거 논쟁들은 현대 과학과 언어학에서 이미 상당부분 정리되고 설명되었다. 선생님과의 논쟁은 현대 과학과 언어학의 바탕에서 인간(혹은 생명체 전반)의 경험에 있어 존재론과 인식론의 우선순위 가치논쟁에 가깝다.


한국말에서 '이'는 밖에 있은 존재 혹은 현상으로 한국사람이 최초의 경험을 가르킬때 내는 소리다. '아니... 이..."처럼. '이것' '이건' '일하다' '읽는다' '일어났다' 등등 한국말에서 '이'는 밖에서 현상이 드러남을 말한다. '한국말이 재미있다"에서 겿씨말 '이'는 '한국말'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것이고 뒤에 나오는 '있'은 앞의 '이'를 받아 'ㅆ다'로서 확정한다.


밖에서 인식된 '이'가 인식한 사람의 머리속에 들어오면 '그'가 된다. '그'는 생각안에 있는 존재 혹은 현상으로 한국사람이 내 안의 무언가를 떠올릴때 내는 소리다. "아니... 그..."처럼. '그것' '그건' '긔디(기억)' '글' '그림' 등등 한국말에서 '그'는 내 안의 무언가를 떠올려 드러냄을 말한다. '그'는 대부분 '이'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책이다'와 '한국말이 재미있다'에서 '그'는 '책'과 '재미'에 해당된다. 이 말들은 모두 경험에 의해 내 안에 기록된 말이나 감정이다.


'이'와 '그'를 연결해 주는 것은 '을/를'이다. 한국말에서 어떤 목적이나 대상을 가르킬때 '을/를'를 쓴다. 을/를이 '이'와 만나면 밖의 목적이나 대상이 된다. '일'은 내 밖에 있은 것을 내가 해야할 무언가로 인식한 상태다. '읽는다'는 밖에 있은 대상을 인식하는 과정이다. 을/를이 '그'와 만나면 내 안의 목적이나 대상이 된다. '글'은 내 안에 있는 것은 엮어 무언가로 인식한 상태다.


'그림'은 '글+임'으로 '글'이 임자성을 띈 상태다. 이때 '임'은 '이+ㅁ'이다. 즉 '그림'은 내 안의 '그'가 '글'이 되어 '이'로서 밖으로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사람은 '문자'라는 특수한 그림을 만들어 쓰기에 '글'과 '그림'을 구분하고, 나아가 '그릇'까지 구분한다. 이 모든 것들은 '그것'이라는 '그' 엮기에서 비롯되어 '이것'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논쟁의 이름을 뭐라고 할까... '이기론'처럼 '이그론'이라고 할까? 전자는 과학과 언어를 모른채 나름대로 세상의 이치를 차려본 것이라면 후자는 과학과 언어를 아는 상태에서 한국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바꿔나가는지 아는 것이다. 나는 이기론 논란은 우리 삶에 별반 도움이 안된다는 생각이다. 한때 이 논쟁을 한참을 살폈지만 내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고, 어떤 점들은 너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가 뭐라고요?" 우린 미립자와 미생물 존재까지 알고 있는데... 하지만 한국말로 살핀 '이그론'은 내가 하고 있는 말과 삶을 다시 살피게 이끈다. 그래서 너무 많은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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