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 그는 집에 갔다(그는 집에 갔어)
현재 : 그는 집에 간다(그는 집에 가고 있어)
미래 : 그는 집에 갈 것이다(그는 집에 갈거야)
추측 : 그는 집에 가고 있을 것 같다(그는 집에 가고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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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한국사람이 말을 할때 과거는 'ㅅ'을 붙힌다. '이'가 '잇(있)'이 되면 현재적 현상이 완료가 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어'가 '엇(었)'이 되도 마찬가지고, '가'가 '갓(갔)'이 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다' '가다'는 현재적 느낌을 주고, '있었다' '갔다'는 과거적 느낌을 준다. '있다'는 좀 애매해서 과거와 현재의 경계에 걸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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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국말에서 '가다'라는 국어사전에 기본형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거의 쓰지 않는다. 아니 이 말을 쓰는 경우를 사전 외에 본 적이 없다. 말을 할때는 주로 '가지'라고 하고, 글을 쓸때는 주로 '간다'라고 말한다. 한국말에서 'ㄴ'는 무언가가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는 느낌을 준다. 그래서 '간다'라고 말하면 '가'는 행위가 현재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면서 '가고 있다'는 느낌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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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한국말에서 미래를 말할때는 현재형을 그대로 쓰거나 '것'이라는 말을 붙혀 '것이다' 혹은 '것이야'라고 말한다. 최봉영 샘은 이런 말차림을 '말매김법'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 한국말에서 '것'은 모든 존재를 아우르는 말이다. 한국사람에게 '일'은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현상만 '일'이라 여긴다. 미래에 일어날 '일'은 '일'이 아니라 '것'이란 존재로 여겨 '~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위의 미래 예시에 나온 '갈 것이다'의 짜임은 '가+일+것이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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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
한국말에서 '같다'는 이쪽과 저쪽이 서로 '갖'고 있는 것이 '같'을때 쓰는 말이다. '이다/아니다'가 인식하는 사람의 안과 밖의 일치판단이라면 '같다/안같다'는 인식하는 사람이 밖에 있는 두 대상을 비교해 가치판단을 내리는 경우다. 한국사람은 확신하는 미래는 '것'으로 매겨 말하지만, 확신하지 않은 미래는 '것' 뒤에 '같다/같아'라는 말을 덧붙혀 말한다. 그래서 '같다/같아'라는 말은 무언가 겸손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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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과 존재
한국말에서 '이다'는 인식을 의미하다. '이다'의 반대말은 '안이다'로 '이다'라는 나의 인식이 '안'에 있어서 밖에 있는 존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령 '이것은 책이 아니다'의 경우 밖에 있는 '이것'과 내 머리속에 있는 '책'이 일치하지 않기에 '안이다(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다/안이다'는 존재가 어떤 존재를 인식할때 일치관계를 따지는 표현이다. 한국사람은 과거와 현재를 말할때 '있다/이다/인다'라는 말을 쓴다. 즉 인식적 판단으로 말을 한다. 반면 미래를 말할때는 '것/같다'라는 말을 쓴다. 즉 존재적 판단으로 말을 한다. 이런 상황 재밌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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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
나는 이 구분으로 한국사람이 삶을 살아가는 태도를 분석할 수 있다고 본다. 과거에 얽매여 있거나 그리워하는 사람, 현재에 얽매여 있거나 현재만을 살아가는 사람은 주로 자신의 인식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일치든 가치든 모든 판단의 잣대를 자신의 '인식'에 둔다. 반면 미래를 지향하거나 꿈꾸는 사람은 주로 존재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꿈꾸는 미래를 확신하든 추측하든 모두 '것'이란 존재로서 말하기에 항상 자신의 기존 '인식'을 의심한다. 즉 자신의 인식을 의심함으로서 미래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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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런 태도는 한국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데카르트는 과거의 신학적 인식을 의심하고 과학적 발견을 옹호하면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의 인식에 존재를 끌어들임으로서 자신의 인식을 의심하고 앞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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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예시를 영어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Past : He went home
Now : He's going home
Future : He's going home
Guess : I think he's going h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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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차이가 느껴지는가? 나는 영알못이라 더이상 뭐라 말하긴 어렵다. 이제부턴 여러분의 몫이다. 앞서 나는 한국말의 구조와 함께 '인식과 존재에 대한 태도'에 대해 논한 이유는 '덕후'와 '학자'의 차이를 말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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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덕후'를 좋아한다. 또 존중한다. 역사로 은유하면 덕후는 고고학자에 가깝다. 일종의 수집자다. 어떤 덕후는 수집할때 계획을 잘 세운다. 계획을 잘 세운다는 말은 범주구분 즉 분류를 잘한다는 말이다. 이런 덕후가 수집한 물건들이 잘 분류되어 있는 상태는 그 자체로 의미있다. 마치 국립박물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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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덕후의 한계를 잘 안다. 덕후가 과거의 존재들을 모을때는 현재적 인식에 근거한다. 그는 현재 자신이 가치있다고 판단되는 것들에 눈길을 주고 그것을 수집한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덕후의 한계다. 그의 시선이 현재에서 과거로 향한다는 점에서... 달리말해 덕후의 존재 인식이 현재와 과거에 머물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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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는 때론 덕후보다 모른다. 그래서 많은 학자형 전문가들이 덕후들과 아는 것을 갖고 다툴때 밀리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고 학자를 무시해선 안된다. 지금 당장은 학자가 밀릴지 모르지만 학자는 다른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미래에 대한 태도, '의심'이다. 학자는 현재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늘 미래를 지향하기에 과거와 현재를 의심한다. 때론 이 의심이 학자를 게으르게 만들기도 한다. 그렇다고해서 학자를 무시하거나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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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학자중에서 덕후적 태도를 겸비한 분들을 종종 발견한다. 반면 덕후중에서 학자적 태도를 겸비한 분들은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왜 그럴까? 그 이유가 바로 인식과 존재에 대한 태도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덕후는 대부분 과거 현재, 미래를 판단함에 있어 자신의 인식 기준을 가장 중요시 여긴다. 그래서 다른 존재를, 다른 사람의 말에 잘 기울이지 않는다. 반면 덕후적 태도를 겸비한 학자는 자신의 인식적 기준을 끊임없이 의심하기에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에 늘 열려 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존중과 존경의 차이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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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덕후만큼이나 학자를 좋아하고 존중한다. 나는 덕후를 존중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나는 오로지 학자만을 존경하고 따른다. 기본적으로 나 또한 '의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따르는 학자들은 결코 게으르지 않다. 그들의 시선은 미래를 향하고 있지만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탐구한다는 점에서 이분들 또한 덕후다. 덕후와 학자를 모두 겸비한 분들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