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디학의 선생님들이 모여 디자인학에 대해 토론을 했다. 우리는 각자 디자인에 대한 언어학을 갖고 있었고 일정부분 서로 공유하는 포인트가 있었다. 다만 그 포인트를 설명함에 있어 각자의 이해와 표현방식에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학생들은 각각의 수업을 들으며 때론 다양한 관점이 흥미로우면서도 때론 그 차이가 혼란스러움을 호소했다. 디학 선생님들은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그 차이를 좁힘으로서 학생들에게 혼란스러움을 줄여주자는 취지로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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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유하는 포인트는 바로 스콧 맥클라우드의 <만화의 이해>에 나오는 삼각형 도식이다. 이 도식은 그림과 글의 다양한 시각적 기호들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식으로 그래픽디자인을 이해하는데 있어 아주 유용한 도구다. 그래서 디학 선생님들은 이 삼각형을 갖고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디자인을 설명해 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는 모두 '언어'라는 말을 쓰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시각언어' 다른 한편으로는 '은유언어'라는 말을 사용했다. 실제로 '시각(상징)언어'와 '은유언어'는 현대 언어학의 두가지 갈래이다. 마치 물리학에 있어 입자를 말하는 상대성이론과 파동을 말하는 양자역학이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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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일단 큰 틀에 있어 용어를 정리했다. "우리가 하는 학문의 이름은 뭐지?" 나는 시각언어학과 은유언어학을 제안했는데, 이 구분은 다소 혼란을 줄 것 같아서 결국 '시각언어학'으로 통일했다. 이 시각언어학 안에 은유언어학을 포함시켜 '시각언어학은 시각요소와 은유구조로 구성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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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배우려면 일단 한글자소에 대해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시각언어를 배우려면 먼저 시각요소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한글은 말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다. 그래서 자신의 하고 싶은 말을 알아야 한다. 말은 은유(여김)이다. 즉 한글로 말을 표현한다는 것은 시각요소를 활용해 은유를 표현하는 행위와 같다. 그래서 시각언어학을 제대로 배우려면 시각언의 자소에 해당되는 '시각요소'와 시각언어의 말에 해당되는 '은유구조'를 모두 알아야 한다. 다행이 디학의 선생님들은 크게 시각요소를 중심으로 디자인을 가르치는 선생님과 은유구조를 중심으로 디자인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두개의 관점을 모두 배우고 있었다. 단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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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맥클라우드의 모형(이하 모형)을 갖고 설명하면, 시각요소적 관점은 왼쪽의 그림들이 있는 삼각형의 왼쪽 아래 꼭지점(reality)에서 시작해 오른쪽은 글들이 있는 삼각형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가령 어떤 경험을 다양한 그림으로 표현하고 이를 다시 조합해 큰 틀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이 그림은 개인의 경험이 언어적으로 재구성된 그림이다. 그리고 나서 의미있는 내용(가령 콘서트, 사랑, 인생 등)을 가져와 그림에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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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은유구조적 관점은 오른쪽 글이 있는 삼각형 아래 꼭지점(meaning) 시작해 왼쪽 그림들이 있는 삼각형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어떤 추상적인 생각을 소통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험적인 표현들이 있어야 한다. 가령 '인생'이라는 모호한 생각은 '마라톤'이라는 구체적 경험을 표현한 말로서 은유해야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 물론 상대는 '마라톤'을 해본 경험이 있어야 이 은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경우 추상적이고 모호한 글이 경험적이고 구체적인 그림으로 이해되고 소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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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일반적 디자인 프로세스는 '시각요소적 관점'보다는 '은유구조적 관점'에서 진행된다. 예를 들어 '서울'이라는 도시를 브랭딩해야 한다면 먼저 '서울'을 무엇에 은유하면 좋을지 고민한다. 반면 디자이너는 거꾸로 서울에 관련된 이미지들을 조사하고 이미지맵을 그린 다음 그 그림에서 서울을 재발견하는 방식으로 디자인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 은유적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무척 독특한 방식으로 서울이 이해되고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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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시각언어학은 시각요소와 은유구조라는 두가지 디자인 관점이 모두 유효하다. 우리는 이 두가지 관점과 흐름을 면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어제는 시각요소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토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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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론에서 두가지 흥미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는 말과 글의 관계를 완전히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림'과 '글'을 구분하고 '말'을 표현하는 방식이 '글'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토론을 마치고 이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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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운동경험을 소통하기 위해 소리느낌을 만들어내고, 이 소리느낌이 모여 의미있는 말이 형성된다. 사람은 이 말을 갖고 생각을 하는데, 한국사람은 이 생각을 '그'라는 발음에 담는다. 한국말에서 '것'은 모든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한국말의 '그것'은 '생각'과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사람은 '그것(생각)'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3가지 가능성을 갖고 있다. 바로 '그림, 글, 그릇'이다. 이 가능성이 '꼴'과 '색'을 통해 표현되면 '그림꼴' '글자꼴' '그릇꼴'이 된다. 혹은 그림색, 글자색, 그릇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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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나열한 몇가지 표현들 중 '그릇꼴'처럼 다소 어색한 말이 섞여 있다. 하지만 굳이 내가 이런 표현을 쓰는 이유는 우리는 '그'라는 생각의 발현을 표현가능한 범주 유형인 '그림, 글'로 연상하고 이를 실제로 표현하게 되는데 이 표현된 것도 '그림, 글'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념적인 '글'과 표현된 '글'을 같은 것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물론 말의 소통과 이해에 있어서는 틀리지 않지만 글로 쓰여질 때는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서로의 개념적인 '글'이 표현된 '글'이 모두 '글'이라는 글로 쓰여지기에 아주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제 글을 이 글로 표현하셨군요. 그런데 저는 이 글이 아니라 저 글이 더 좋은데"라고 말하면 상당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이때 개념적인 가능성 상태를 '글'이라 말하고 개념이 시각적으로 표현된 상태를 '글자꼴'이라 말하면 곤란한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아 제 글을 이런 글자꼴로 표현하셨군요. 그런데 저는 이 글자꼴이 아니라 다른 글자꼴이 적합한거 같아요"라고 말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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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그' 범주에 있는 '그것'과 '글'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함을 깨달았다. '그것=생각'은 곧 '말'이고 이 '말'은 '글'로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말'은 '꼴과 색'을 지닌 다양한 시각적 표현방식이 있는데 그 방식은 크게 '그림' '글' '그릇'이고, 이 방식이 실제로 표현되면 '그림꼴, 글자꼴, 그릇꼴'이 된다. 그래서 '그(기억) -> 그것(말) -> 그림+글+그릇 -> 그림꼴+글자꼴+그릇꼴'의 한국말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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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추상적인 요소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이다. 나는 '추상'은 의미를 지워가는 것이라 여겼는데, 다른 선생님은 추상은 개인적인 생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이미지라고 주장했다. 모형은 왼쪽 꼭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나아갈때 크게 두가지 경로를 지닌다. 아래로 나아가는 경로는 언어적 형태가 도드라지는 경로이고, 위로 나아가는 경로는 추상적 형태가 도드라지는 경로이다. 나는 아래로 가는 경로는 보편, 위로 가는 경로는 추상이라고 설명해 왔는데, 다른 선생님은 아래로 가는 경로는 공통적 언어, 위로 가는 경로는 개인적 언어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선생님은 '운동'과 '위치' 개념을 가져왔다. 아래로 가는 경로가 다소 정지된 '위치'라면, 위로 가는 경로는 움직임이 느껴지는 '운동'경로라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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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이 끝날 즈음 나는 이 두개의 주장이 상당히 일리가 있으며, 나아가 '추상'이라는 요소에 대해 상당히 새로운 인사이트를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20세기 초 '추상'이라는 요소가 형성될때 두가지 미술 현상이 일어났다. '인상파'라는 개인적 관점의 그림과 '미래파'라는 운동적 관점의 그림이 출현했고, 이 흐름들이 상호작용하면서 '추상'이라는 새로운 요소의 출현을 불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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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도 간간히 이 모형에 있는 시각요소들의 순환과 운동성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 이 의견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나아가는 은유구조적 관점에서 나온 의견이었는데, 시간상 충분히 다루진 못했다. 나는 이 의견이 은유적 관점에서 이야기 될 예고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은유를 다루기에 앞서 먼저 시각요소적 관점으로 서로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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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은 모두 '평어'로 진행되었다. '평어'의 유용성과 힘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평어'는 말에 자유를 주어 어떤 위계질서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토론이 진행되는 내내 '평어'가 이런 식의 대화에 가장 적합한 언어형식임을 확인하는 순간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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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대화들을 복기하면 할수록 너무 흥미롭다. 다음 시간이 너무너무너무 기대된다. 이 대화가 몇차례 진행되고 끝이 날때 즈음엔 크게 성장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우리 모두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