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라

by 윤여경

개인주의 사회에 들어오면서 정치학에 있어 아주 풀기 어려운 난제가 생겼다. 바로 "자유로운 개인이 왜 사회와 국가에 속박되는가?"라는 문제다. 이 문제는 모든 것이 개인의 계약관계로 구성되는 근현대에서 정치와 경제만이 아니라 국가와 기업, 직업, 학교, 가족 등 모든 사회적 관계로 연결된다. 때문에 나는 항상 이 문제를 머리 속에 넣고 생각해 왔다.


"왜 나는 사회적 규범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는거지?"


오늘 최봉영 샘과 통화하면서 이 문제가 결국 '말'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선생님은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한국말에서 '나라'란 '나를 어떤 존재로서 규정하는 태도'라는 얘기를 계속 해오셨다. 오늘은 '나라'라는 말을 조선 시대 예를 들어 풀어주셨다.


최근 선생님은 '나'를 3가지 자아로 구분한다. 조건적 자아(conditional self), 자기중심 자아(egoistic self), 상호적 자아(interactive self)이다. 이 세가지 자아를 조선시대에 적용하면, 사농공상의 신분과 제도는 조선 시대의 조건적 자아를 형성시킨다. 그리고 사대부가 뜻을 세워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것은 자기중심 자아에 해당된다. 그리고 조정에 나아가 국가 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상호적 자아에 해당된다. 이 설명은 아주 신박한데 그 이유는 '나'라는 자아 개념을 통해 하나의 국가와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말 '나라'는 영어로 컨트리(country)나 퍼블릭(republic)이라 말한다. 컨트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개념이고, 공화국인 리퍼블릭은 '공공의 것'을 의미하는 라틴어 res publica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 유명한 플라톤의 책 <국가>의 그리스어가 '폴리테이아'이고 라틴어가 '퍼블리카'이다. '국가(國家)'는 한자어이다. 최봉영 샘은 <조선시대 유교문화>에서 성리학 사회는 혈연관계인 '家'의 확장으로서 '본가' '업가' '국가'로 확장되어 간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리학 개념인 '국가'는 혈연관계인 '가(家)' 개념이 공동체 관계 전체로 확장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위 단락에서 볼 수 있듯이 '나라'를 지칭하는 서양말과 중국말에 모두 '나'라는 자아 개념이 배제되어 있다. '리퍼블릭'이나 '국가'는 공공이 강조되거나 가족이 강조되는 말이기에 이 말로서는 '나'와 국가 혹은 사회의 공동체를 연결시켜 생각할 여지가 별로 없다. 때문에 앞서 질문한 개인주의 사회의 난제 "자유로운 개인이 왜 사회와 국가에 속박되는가?"에 별반 해줄 대답이 없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봉영 샘이 말씀하신 '나라'의 바탕뜻. 그리고 '나=자아'의 3가지 구분은 아주 유익한 개념체계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 공자, 붓다, 플라톤과 마르크스 등 현대 사회학을 읽어 왔지만 '나'를 중심에 놓고 국가와 사회를 풀어본 내용을 별로 본적이 없다. '나'에 집중했던 프로이트마저도 '신경'과 '신화'에 집중함으로써 '조건적 자아'와 '자기중심 자아'의 개념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다. 현대인들이 난제로 여기는 '상호적 자아'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선생님도 이런 말씀을 하시며 중국과 인도에서도 프로이트처럼 '심학(心學)'이 있었지만 '상호적 자아'를 살짝 건드리기만 했을뿐 이를 국가나 사회의 공동체 개념까지 끌고가지 못했다고 지적하셨다.


우리는 이 대화를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조건적 자아 -> 자기중심 자아 -> 상호적 자아를 넘어 '깨달은 자아'라는 새로운 개념을 이야기했다. 이 흐름을 다시 한국말로 풀면 '그냥인 나 -> 만인 나 -> 쪽인 나 -> 고마인 나'이다. 이를 좀 더 쉽게 풀면 '절로하는 나 -> 스스로하는 나 -> 위하는 나 -> 고마운 나'이다. 여기서 '고마인(고마운) 나'가 바로 '깨달은 자아'이다. 선생님은 임시로 이 자아를 영어로 awareness self라 말하셨다.


'스스로하는 나'는 '~만'을 생각하는 자아로서 '저만, 저들만'에 해당되고, '위하는 나'는 '~쪽'까지 생각하는 자아로서 '남까지, 것까지'에 해당된다. 선생님은 '만'과 '쪽' 사이에 '저희-너희'라는 말을 추가해 '저희까지'라는 '쪽 자아'를 추가했다. 나는 '저희'를 '만'과 '쪽'을 연결시키는 경계적 개념으로 두자고 주장했는데, 선생님은 '저희'라는 말 자체가 '쪽'을 인식한 상태이기에 '쪽'으로 두는 것이 맞다고 하셨다.


나는 통화를 마치고 인문적 자아구분을 과학적 자아 구분인 '대사-감각-지각-생각'으로 확장시켜 매칭해 보았다. 사실 대사, 감각, 지각, 생각의 구분도 최봉영 샘이 <주체와 욕망>에서 고안하신 분류다. 조건적 자아인 '절로하는 나'는 먹고 싸는 '대사'이고, 자기중심 자아인 '스스로인 나'는 '감각+지각과정'이고, 상호적 자아인 '위하는 나'는 '지각+생각과정'이고, 깨달은 자아인 '고마운 나'는 '욕망'에 매칭시킬 수 있다.


'스스로하는 나'에서 '위하는 나'로의 전환은 동물이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과 같은 경우다. 동물은 저만을 위해 혹은 가족처럼 혈연으로 연결된 저들만을 위해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은 남까지 것까지 고려하며 살아간다. 그 차이가 뭘까? 바로 '말'이다. 사람은 '말'이라는 독특한 생각과 소통 수단을 갖고 있기에 이 '말'을 통해 더 멀리, 더 크게 생각하고 욕망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이다. 덕분에 '나=자아'가 가족을 넘어 작게는 업가인 직장, 직업, 학교, 크게는 국가와 세계라는 '나라=규정된 자아'로 확대할 수 있다. 나아가 '것'까지 확장하면 '나'가 지구와 우주의 모든 존재와 연결되었다는 인식으로 확장할 수 있다.


뇌과학에는 '오래된 경로'와 '새로운 경로'라는 말이 있다. '오래된 경로'는 뇌의 후배엽을 거치지 않고 바로 두정엽의 행동으로 연결되는 경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오래된 경로를 갖고 있다. 새로운 경로는 독특하게도 사람만이 있다. 이 경로는 후배엽과 전두엽을 거쳐 두정엽으로 가는 경로다.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독특한 점이 바로 뇌의 후배엽과 전두엽의 발달이다. 사람은 감각정보를 후배엽으로 보내 기존의 기억과 엮어 지각적 인식을 한다. 이를 한국말로 '얼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얼이'를 전두엽으로 보내 생각을 통해 무엇무엇이라 여긴다. 이를 한국말로 '알이'라 말한다. 이 생각 알이가 '말'이 되면서 공공적 소통이 가능해진다.


사람은 이 '말'로서 생각하고 욕망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그 덕분에 사람은 기억을 오랫동안 유지시킬 수 있고, 수동적 감각을 능동적으로 통제할 수 있으며, 아주 유연하게 편집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를 뇌과학에서 '장기기억'이라 말한다.


사람의 뇌구조가 '말'을 형성시킨 것일까, 아니면 '말'이 사람의 뇌구조를 바꾼 것일까? 무엇이 우선인지는 모르겠지만 둘이 서로 상호적인 진화를 거듭했다는 점은 확실한듯 싶다. 이런 점에서 '말'은 '나'를 규정하고 이 나의 규정이 '나라'라는 말이며, 이 '나라'가 자아와 국가, 사회를 설명함에 있어 아주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아래 도식은 그 전체적 흐름을 정리한 것이다.


오늘의 대화와 아래 도식의 하일라이트는 바로 '깨달은 자아=고마운 나'의 발견이다. 이 발견으로 인해 이제 '나와 나라' 즉 '자아와 사회'라는 큰 그림이 어느정도 체계를 이룬듯 싶다. 오늘도 큰생각 어른이신 최봉영 샘께서 작은생각 어린이인 나에게 큰 깨달음을 선물로 주셨다. 요즘은 매일매일이 어린이날이고 스승의 날이다. 늘 고마운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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