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있어 '환유'와 '은유'

by 윤여경

레이코프와 존슨은 <몸의 철학>에서 언어는 '은유'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가령 "시간"이란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선 "지나간다"라는 말을 써야 한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지나갔네"라고 말함으로서 우리는 '시간'의 개념을 인지할 수 있으니까. 이때 '지나간다'는 말은 무언가가 앞에서 뒤로 혹은 뒤에서 앞으로 움직이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마치 자동차나 자전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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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코프와 존슨은 사람이 하는 말의 상당수가 앞과 뒤, 위와 아래, 안과 밖의 은유로서 소통된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사람 대부분의 경험이 앞뒤, 위아래, 안밖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뒤, 위아래, 안밖으로 이루어진 은유는 대체로 보편적이다. 이때 '보편'이라 말은 '넓게(普) 두루(遍) 사무친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universality나 generality를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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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는 추상적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유사한 어떤 것을 당겨와 여기는 것이다. 가령 추상적인 '인생'을 설명하기 위해 '마라톤'이란 것을 당겨와 여긴다. "인생은 마라톤" 혹은 '사랑'을 당겨와 여길 수도 있다. "인생은 사랑" 이때 레이코프는 "인생은 사랑"보다 "인생은 마라톤"이 훨씬 소통이 수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추상'적인 관념을 설명하려면 '구상'적인 경험이 유효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생"만큼이나 추상적이라 마라톤처럼 그 의도와 의미가 바로 이해되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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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레이코프와 존슨의 '은유'를 거꾸로 놓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은유'가 관념이 경험과 만나는 것이라면, '환유'는 경험이 관념을 대변한다. 우리는 말을 할때 종종 부분을 말하면서 관념 전체를 지칭할때가 있다. "저기 여경이 온다" "어디?" 그래도 이해가 안되면 경험으로 전체 관념을 지칭한다. "저기 노란색 옷" 이때 "노란색 옷"으로 "여경이"를 환유한 것이다. 이처럼 환유는 일상에서 많이 쓰여지는 말이다. 아래 최봉영 샘이 그린 도식에서 "사람은 빵만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라는 말에서 "빵"은 단순히 "빵"이라는 부분적 경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들"이라는 관념 전체를 환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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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가 추상적인 것을 설명하기 위해 경험적인 구상을 끌어오는 것이라면, '환유'은 경험적인 구상에다 추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접근이다. 즉, '환유'는 '은유'의 반대 방향이다. 사람의 말은 '은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환유'도 많다. 아니 어쩌면 '은유'보다 '환유'가 더 많을 지도 모른다. 어제 최봉영 샘은 '바람'에 대해 글을 한편 쓰셨다. 바람을 4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는데 첫번째 바람은 우리가 경험하는 그 '바람'을 말한다. 그리고 나머지 3개의 바람은 모두 '환유'이다. '바람'이라는 현상에 의미를 담아서 쓰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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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언어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히 풀렸다. 궁금증이 풀리니 긴장감도 풀렸다. 언어에 대한 어려움이 사라졌다고 할까.... 결국 사람들은 경험과 관념의 매개로서 언어를 활용한다. 그 활용방식은 '환유'에서 '은유'로 올라가고, 때론 '은유'에서 '환유'로 내려온다. 이 흐름은 '말'언어만이 아니라 '글'언어도 그렇고, '시각'언어도 마찬가지다. 즉 사람의 모든 언어는 '환유(짚어여김)+은유(당겨여김)'의 흐름으로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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