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디학(designerschool.net)의 교육이념과 방향에 대해 고민이 많다. 이 고민을 정리해 보는 차원에서 몇자 끄적여 본다.
1. 디학은 기본을 추구한다.
보통 디자인 교육은 다양한 매체(혹은 분야)를 배우는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매체 중심의 디자인 교육은 옷이나 제품, 브랜딩 등 디자인과 관련된 다양한 매체를 다룰 수 있는 기술에 디자인을 적용하는 과정이다. 이런 접근으로는 단기간에 디자인을 제대로 익히기 어렵다는 판단이다. 그래서 디학은 매체를 특정하지 않는다.
교육을 세포에 비유하면 다양한 매체를 통해 디자인을 배우는 경우는 성체세포와 같고, 디자인 기본을 탄탄히 해 다양한 매체로 응요하는 경우는 줄기세포와 같다. 효율적인 교육이라면 하나만 할 줄 아는 성체세포보다는 다양한 곳에 응용 가능한 줄기세포식 교육이 맞다. 우리는 믿고 있다. 기본이 탄탄한 디자이너는 어떤 매체에도 금방 적응할 수 있다고. 그래서 디학은 철저하게 기본을 중심으로 가르친다. 디자인의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일가? 디자이너로서 근본적인 역량이 무엇일까? 이 가치와 역량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면 좋을까... 등등 이런 고민을 수업에 반영하고자 한다.
2. 디학의 기본 교육은 인문학과 과학으로 구분한다.
우리나라 공교육은 크게 두가지로 구분된다. 이과와 문과. 이 구분은 여러 사람에게 비판받기도 하지만 나는 이 구분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태도를 잘 구분하고 있다고 본다. 삶은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하나는 '답이 있는 상황'이고 다른 하나는 '답이 없는 상황'이다.
칸트/아렌트는 이를 지성과 이성으로 구분한다. 지성은 '답이 있는 지식'이고, 이성은 '답이 없는 생각'이다. 이때 생각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지향한다. 이를 교육에서는 이과와 문과로 구분하고, 학문에서는 과학과 인문학으로 구분한다.
디자인에도 인문학과 과학이 있다. 디자인인문학은 디자인씽킹(디자인생각)이고, 디자인과학은은 디자인규칙(디자인감각지각)이다. 심리학으로 치면 디자인인문학은 생각심리학이고, 디자인과학은 지각심리학이다. 디자인분야에서 자주 언급되는 게슈탈트심리학(형태심리학)은 디자인과학인 지각심리학이라고 볼 수 있고, 철학에서 자주 인용하는 정신분석학이나 언어학은 디자인인문학인 생각심리학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둘을 잘 구분해야 한다.
디학은 크게 '답이 없는 디자인'으로서 디자인인문학 과정과 '답이 있는 디자인'으로서 디자인과학 과정으로 구분되어 교육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디자인인문학은 '언어로서의 디자인'이고, 디자인과학은 '타이포그래피 디자인'이다.
3. 디자인인문학은 '언어로서의 디자인'이다.
디학에서 디자인인문학은 '언어로서의 디자인'을 지향한다. 이를 다시 3가지로 세분화시켜 '시각언어' '관념언어' '촉각언어'로 구분한다. 첫번째 시각언어는 디자인의 가장 근본적으로서 디자인요소들을 최소단위 형태소로 분해하고 이를 다시 조합해 언어화 시킬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과정이다. 마치 영어를 배울때 알파벳을 알고 이를 조합해 영어로 읽기와 쓰기를 배우듯이.
관념언어는 디자인철학으로 '디자인'이란 말의 개념을 둘러싼 맥락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은유를 통한 글쓰기 방법론, 다양한 주제를 활용한 글쓰기 실습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촉각언어는 일러스트를 배우는 과정이다. '촉각'이란 말이 암시하듯 디학의 일러스트 과정은 철저하게 디지털 기기를 배재한다. 말과 글로서 담기 어려운 생각을 추상적 형태나 그림으로 표현한다. 다양한 도구를 활용해 다양한 매체에 그려보는 실습과정이다. 이 수업시간엔 가끔 와인이 놓여있다.
4. 디자인과학은 '타이포그래피'이다.
디학에서 디자인과학은 '타이포그래피'로 대변된다. 디학의 타이포그래피 교육은 '구조로서의 디자인'을 지향한다. 타이포그래피는 글자가 구성되는 규칙과 구조가 어느정도 역사적으로 정립되어 있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피를 배우면 디자인의 전문적 규칙과 구조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된다. 역사적으로 정립된 규칙과 구조를 알면 디자인을 할때 어떤 선택이 적절한지 그 기준을 알 수 있게 된다.
디학의 타이포그래피 교육을 크게 3가지로 구분하면, '글자구조' '형태구조' '매체구조'이다. 글자는 소통의 가장 기본이 되는 매체이기에 글자구조를 배우면 자연스럽게 소통의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고 재구성되는지 깨닫게 된다. 글자구조 수업에서는 글줄사이, 글자사이 등 타이포그래피의 규칙에 따른 글자 다루기와 글자 형태가 변화되는 디자인역사를 배운다. 형태구조를 다루는 수업은 글자 만들기(타입디자인)와 글자와 이미지를 조합하는 실습을 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를 글자형태로서 표현하는 연습을 한다.
마지막으로 디학의 매체구조 수업은 '책 만들기'이다. 책은 대중적 소통에 있어 가장 오래된 기본매체이다. 역사적으로 새로운 매체는 기존의 매체가 가진 맥락을 답습하면서 변화해 왔다. 우리 시대는 디지털 매체로 변화하고 있지만 제대로된 책을 만들 줄 알면 디지털 매체에 적응하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판단이다. 디학은 타이포그래피 교사들은 디자이너로서 기초와 기본은 여전히 책디자인에 있다고 생각한다.
5. 글쓰기와 타이포그래피
디학의 문과, 디자인인문학을 한마디로 하면 '글쓰기'이다. 디학의 이과, 디자인과학을 한마디로 하면 '타이포그래피'이다. 글쓰기는 답이 없고 타이포그래피는 나름의 답이 있다. 이때 디자인에서 '답'이란 객관적 진리가 아니라 자신의 의도를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런점에서 디학의 디자인교육은 크게 글쓰기와 타이포그래피를 배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타이포그래피는 사실상 책디자인에 응축되어 있기에 타이포그래피를 제대로 배우면 책을 디자인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디학의 학생들은 자신들이 쓴 글을 모아 책을 만들곤 한다. 디학은 불과 2년밖에 안되었지만 이미 디학 학생들이 쓰고 디자인한 책이 3~4권 나왔다. 3권은 정식으로 출판되었고, 1권은 비매품으로 출판되었다. 그 목록을 나열하면 정식 출판된 책은 <에코에세이><은유수업><예의 있는 반말>이고 비매품은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번 디학의 3+4기 졸세도 '글쓰기+책디자인'으로 준비하고 있다. 디학 과정을 마친 사람들이 직접 쓴 글들을 모아 한권의 책을 만들고, 학생들 각자가 책을 디자인한다. 같은 내용의 책이 여러 디자인으로 나오는 과정이랄까. 이 과정의 결과물은 아마 2월중에 공개될 것이다. 기대된다.
6. 정리
나는 위 내용을 디자인의 기본이라 생각하며 적었지만, 글쓰기와 타이포그래피가 적용되지 않는 영역이 있을까 싶다. 이런 점에서 디학은 디자인의 전문적 지식을 배우는 학교를 넘어 자신의 삶을 디자인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학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