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로부터 독서압박을 받는 엄마, 하지만
나는 어릴 때 그림책이나 문고판 책을 읽은 기억이 거의 없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독후감 숙제를 하기 위해 억지로 책을 읽었던 기억이 유일하다. 하지만 그때도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아 답답했다.
남들은 잘 알고 있다는 디즈니 시리즈라던가 하다못해 빨간 머리 앤, 걸리버 여행기 등 세계명작 시리즈도 한 권을 다 읽어본 적이 없다. 문제는 지금도 그런 명작들의 스토리를 잘 알지 못한다.(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나와 정 반대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책을 친구 삼아 자라온 남편은 지금까지도 한결같이 책을 끼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 남편의 좋은 습관은 이제 나뿐만 아니라 세 아이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첫째는 남편 덕에 올해 초부터 한 출판사의 세계 명작 시리즈에 흠뻑 빠져있다. 중고로 야금야금 4회에 걸쳐 들인 책만 해도 벌써 20권이 넘는다. 게다가 진짜 신기한 건 책이 배송되어 오면 앉은자리에서 세 권을 단숨에 다 읽어내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딸을 보고 있노라면
내 딸이 맞나? (껌뻑껌뻑)
진짜 신기하네. 세 권을 어떻게 저렇게 빨리 읽지?
남편 잘 만났다. 아주 감사해.
이 세 가지 생각이 돌아가며 떠오른다. 하지만 이틀 전에는 한 가지 생각이 더 따라왔다.
나도 이제 좀 읽어볼까?
유년 시절 읽지 못했다면 나이 40이 가까워지는 지금이라도 읽어보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남편이 지나가면서 했던 한 마디가 내 머리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시아버님이 어릴 때 가끔 남편이 읽던 책을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셨는데 그게 좋았다던 남편의 말이었다.
나도 딸과 책을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졌다. 게다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먼저 아는 딸이기에 그 내용을 이야기하며 아이와 또 다른 주제로 소통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이게 자연스러운 책 모임의 시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자리 독서를 하고 나서 아이에게 '엄마가 먼저 읽으면 좋을 책을 추천해 달라'라고 부탁했다.
이어진 아이와 나의 대화를 간략하게 정리했다.
딸: 엄마는 어떤 내용을 좋아해요?
엄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좋아. 동물이 나오거나 귀여운 장면이 있거나 아기자기한 내용이 있었으면 좋겠어.
딸: 그럼 톰소여의 모험, 걸리버 여행기, 보물섬은 안 좋아할 것 같아요. 그럼 여자애들이 재잘거리는 내용은요? 앤!! 빨간 머리 앤 어때요?
나: 그런 거 괜찮아. 아참 엄마 그리고 무서운 거 싫어해.
딸: 그럼 마지막에 슬픈 거는요?
나: 싫어. 엄마는 해피엔딩이 좋아. 끝이 행복한 거.
딸: (고민하며 책장으로 직행) 오만과 편견, 제인 에어를 추천해요. 이게 뒤쪽에 기쁜 내용이 있어요.
나: 엄마 그럼 오만과 편견 먼저 읽을게. 이거 영화도 있으니까 책 읽고 영화 보면 되겠다!
실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아이가 나에게 책 추천을 해주다니. 그것도 그냥 자신이 가장 재밌었던 책을 내밀며 "이거 읽어보세요."라고 할 줄 알았는데 아이는 마치 책 추천을 누군가에게 제대로 받아본 것처럼 프로같이 구체적으로 나의 기호를 물으며 마음을 다해 노력해 주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목에서 감동을 받았다. 내 아이가 참 지혜롭게 잘 자라고 있구나. 그리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아는구나 싶었다. 과연 나라면 이렇게 내용을 세세하게 기억해서 구체적으로 선호를 물어보는 과정을 거친 뒤 책을 추천해 줄 수 있을까?
이제 아이가 추천해 준 두 권 중 내가 더 읽어보고 싶었던 <오만과 편견>을 읽을 차례다. 어제는 나에게 책을 좀 읽어보았냐고 묻기까지 했다.(뜨끔) 오늘은 한 장이라도 읽고 자신만만하게 짧은 소감을 공유해주고 싶다.
어째 딸과 엄마의 입장이 좀 뒤바뀐 것 같은 느낌도 있지만,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그저 책을 두고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는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설렌다.
사진 © anniespratt,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