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찾은 인생의 의미
저녁에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한 바퀴를 돌다가 문득 뛰고 싶어졌다. 천천히 뛰다가 문득 전력으로 달리고 싶어졌다. 전력으로 달렸다. 다시 천천히 뛰고 전력으로 다시 뛰었다. 그리곤, 너무 힘들어 걸었다. 이때 걷는 속도는 처음에 걸을 때의 속도보다는 느렸다. 이럴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처음부터 빠른 속보로 걷는 다면 잠깐 빨리 뛰다가 지쳐서 천천히 걷는 것보다 훨씬 더 빠르지 않았을까?'
중, 고등학교 때 매년 개교기념일마다 10킬로 단축마라톤을 했다. 마라톤 경험이 없는 우리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와 함께 힘차게 뛰다가 반환점을 통과하고 난 이후에는 거의 걸어서 결승점을 통과했다. 이때 상위권에 이름을 올린 친구는 처음부터 계속 일정한 속도로 꾸준히 뛴 친구였다.
인생은 흔히들 마라톤에 비유한다. 왜 마라톤일까?
첫 번째는 인생은 마라톤처럼 긴 경기이다. 그러니, 혹여 중간에 힘든 일이 있더라도 주저앉지 말고 다시 뛰라는 의미 일 것이다.
두 번째는 너무 급하게 서두리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가지도 말고 묵묵히 뛰어가는 마라토너처럼 달리라는 의미 일 것이다. 전력질주를 하다가 보면 언젠가 쓰러져서 완주를 못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세 번째는 너무 힘들면 걷기라도 하라는 의미 일지도 모른다. 이건 내가 살면서 가끔 드는 생각이다. 멈추면 끝이지만 천천히 걷기라도 하면 조금씩이라도 앞으로 가는 것이고 언젠가는 다시 뛸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최소한 걷기라도 해라. 이 모든 의미가 성실히 나아가라는 의미에서 마라톤에서 인생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인생을 마라톤이라고 하면 어떤 반응일까? 왜 더 이상 인생이 공정한 마라톤이 되지 못하는 걸까?
첫 번째는 인생에서의 마라톤 선수는 비슷한 능력이 아니다. 물론 예전에도 각자의 능력의 차이는 있었다. 그러나, 그 능력의 차이가 개인의 노력 여부에 따라서 어느 정도는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이었다. 그러나, 요즘엔 노력을 해서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은 점점 줄어든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멀어지는 것이다. 개인의 능력도 부모의 재력이 상당 부분의 영향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부환경요인으로 결정되는 능력의 차이는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두 번째는 인생에서의 마라톤은 모두가 공정하게 발로 뛰어가는 것만은 아니다. 능력의 차이로 벌어지는 차이는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따라잡을 수도 있을 것 같은 차이다. 그러나, 요즘엔 어떤 이는 자동차를 그것도 스포츠카를 타고 달린다. 심지어 무인 자동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제트기에 아님 우주선을 타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인생의 마라톤에서 서로의 간격은 이미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세 번째는 이런 속도의 차이는 도착지의 차이를 만든다. 더 이상 인생의 마라톤은 42.195킬로미터가 아니다. 어떤 이들은 어린 시절 이미 그 거리를 완주해 버렸다. 난 열심히 달린다고 생각하나 어떤 이들은 그 마라톤 코스를 몇 번이나 이미 왕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면서 인생을 다시 정의하고 싶어졌다.
‘인생은 나만의 산책’이라고 하고 싶다.
인생은 마라톤 경기가 아닌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고, 걷고 싶으면 걷고, 뛰고 싶으면 뛰어도 되는 그냥 산책이라고 하고 싶다. 힘들면 벤치에 앉아도 되고 아니면 옆의 경치 구경을 해도 좋다. 산책하는 강아지나 아장아장 걷는 아기를 봐도 좋다. 같이 산책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야기하며 가도 좋다.
난 기록경기가 아닌 각자의 목적지가 있는 산책의 인생길을 동반자들과 같이 함께 가고 싶다. 물론 그 동반자들도 각자의 길이 있겠지만 함께 가는 이 순간은 서로 행복하게 이야기하며 가고 싶다.
어제 간만의 전력질주로 계단을 걸을 때 허벅지에 신호가 온다. 적당한 속도로 산책했다면 조금 더 멀리 갈 수는 있었겠지만 달린 후의 상쾌함을 느끼진 못했을 것이다. 오늘도 난 마라톤이 아닌 나만의 산책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