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퇴 공문이 떴네요.
매해 1월 첫날이면 희망퇴직이라는 내용의 공문이 뜬다.
흔희들 '명퇴'라고 불러서 자세히 보았더니 '희망'이라는 글자가 '퇴직'이라는 글자 앞에 붙어있다. 사실 그 단어만 놓고 보면 명예퇴직이든 희망퇴직이든 퇴직이라는 말 앞에 붙은 수식어가 이렇게 좋아보여도 되는지 모르겠다.
명예퇴직이란? 정년연령에 도달하지 않는 근로자들에게 근속연수나 연령 등 일정한 기준을 충족하면 그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규정상의 퇴직금 이외에 금전적 보상이나 가산퇴직금 또는 위로금을 추가로 지급하는 등 우대조치를 하여 정년 전에 사직의 형태로 근로계약관계를 종료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사실 은행의 정년은 만 60세이나 만 56세부터는 임금피크제에 진입하게 되어 매년 임금이 차감된다. 임금이 차감되다 보니 일정금액의 위로금을 받고 퇴직하는 것이나 임금피크제로 일하는 것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임금피크제가 도입된 때부터 만 56세가 퇴사를 해야 하는 기준이 되었다.일정기준에 따라 임금피크제가 연단위로 유예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때도 매년마다 명퇴대상이 되어 다시 유예를 받느냐 아니면 명퇴를 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된다.
사실 멀게만 느껴졌던 그 명퇴를 고민해야 하는 순간이 어느덧 한자리 숫자의 연수로 들어오게 되면서 서서히 명퇴가 남이야가 아닌 나에게 해당되는 순간임을 체감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퇴직할 무렵에 명퇴제도가 존재할지도 사실 의문이다. 그러면서 무언가를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닌지 막연한 두려움이 생긴다. 그러나, 이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정신없이 회사일을 하게 되면서 그 준비라는 걸 잊어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내년 이맘때에 다시 그 막연한 두려움에 쌓이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명퇴를 고민하는 그 선배들은 30년을 한 직장에서 일하면서 급여를 받고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들을 공부시키고 또 살 곳을 마련하고 그렇게 그렇게 직장에서 명퇴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정년퇴직은 못했지만 잘 일했다고 또 수고했다고 퇴직이라는 이름 앞에 명예를 붙인 ‘명예퇴직'이라는 단어가 이중적 의미로 다가온다. 쓸쓸히 사라질 수도 있는 퇴직의 순간에 명예라는 단어를 퇴직이라는 단어 앞에 붙여 그 순간에 성스러운 이미지가 더해진다.
나의 아버지도 대기업에서 오래 근무를 하셨다. 토목을 전공하셔서 항만, 도로, 댐 등 여러 공사장을 다니셨다. 내가 초등학교 무렵에는 중동의 건설 붐이 일어서 사우디에서 일하시며 달러를 벌어들이시는 국위선양도 하셨다.
은행으로 치면 지점장의 위치인듯한 현장소장으로 내가 고등학교 때쯤에 일하셨다. 가족은 서울에 있었지만 그 현장은 포항이어서 아버지와는 그때는 주말에만 만났었다. 그렇게 힘들게 아버지도 가족을 부양하면서 나와 동생들 공부를 시키셨다.
아버지는 그 대기업에서 임원도 되셨다. 그렇게 잘 나가실 것 같으셨던 아버지는 임원이 되신 그 이듬해 갑자기 퇴사를 하시게 되셨다. 아버지의 자발적인 퇴사는 아니셨다. 나도 이해는 안 가는 상황을 아버지는 더 힘들어하셨던 것 같다.
나에겐 아직은 시간이 조금 더 남은 상황이지만 갑자기 그 당시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퇴직이라는 순간을 염두에 두지 않으셔서 동생들은 대학교를 아직 졸업하지 않은 시기에 걱정이 많으셨을 것 같다. 다행인지 아버지는 다른 지방의 회사에 다시 입사를 하셔서 다른 공사 현장을 맡아 얼마 더 일을 하셨다.
올해 명퇴공문은 신문기사에도 나왔던 것처럼 40대 중반의 일반직원들까지 확대되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있는 이 시기에 명예퇴직이라는 용어만은 거창한 퇴직도 하고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지는 은행원들이 다른 직장보다는 나은 상황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느 한 방면에 뛰어난 스페셜리스트보다는 두루두루 잘하는 제너럴리스트로 살아온 은행원들에겐 퇴사라는 것이 쉽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과장승진하면서 '5년 뒤에는 퇴사할 거다'라고 승진자연수에서 외쳤던 나의 패기는 어디 가고 나도 어느덧 우물 안 개구리로 전락해 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때는 5년 뒤에는 내 발로 은행을 박차고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키워 시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을 때였다. 그러나, 그런 모습도 주어진 업무와 일에 치이다 보니 스스로 나를 은행 안에 가두게 된 것 같다.
또 몇 주일 뒤면 많은 선배들이 몇 장이나 되는 퇴직자명단에 이름을 올리시며 떠나가실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그분들 모두에게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젊은 청춘을 한 직장에서 바치며 누군가의 아들, 딸로 시작하여 지금은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로 책임을 다하고 떠나시는 자리이니 말이다. 그리고, 그분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지금의 회사가 있었다고 본다.
어느 곳의 슬로건이 생각난다. "그대! OO의 자랑이듯 , OO! 그대의 자랑이어라" 회사가 직원을 자랑하고, 직원이 회사를 자랑하며 일한 세월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하시며 떠나시길 바란다.
퇴직명단 공문의 이름으로 그분들은 떠나지만 각자의 곳에서 직원들과 웃으며 떠나기길 바란다. 그 안에서 평생을 몸 담은 직장을 자랑스러워하고 직장도 명예로운 퇴직으로 그분들을 아름답게 보내드리는 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